독일이 2월 23일 총선거를 앞두고 있다. 당초 9월에 치러질 예정이었지만 사민당(SPD)과 녹색당, 자민당(FDP)이 참여해왔던 연정이 독일 경제를 어떻게 회복시킬지를 둘러싼 이견으로 인해 붕괴하면서 당초 예정보다 7개월 빨리 치러지게 되었다. 현재까지 여론 조사 결과는 중도 우파로 분류되는 기민련(CDU)이 30%의 지지율로 1위를 달리고 있다. 급진 우파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20%로 2위를 유지하고 있으며 사민당(15%), 녹색당(13%) 등이 뒤를 따르고 있다.
최근 독일 경제는 위기 상황이다. 국내총생산(GDP)은 3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할 가능성이 높고 잠재성장률은 이미 1.4%에서 0.4%로 하락한 것으로 추정된다. 독일을 대표하는 제조업이 직격탄을 맞으면서 자동차, 화학 등을 중심으로 사업장 폐쇄와 대규모 감원이 진행되고 있다. 특히 수입 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화학 분야가 심각하다. 독일산업연맹(BDI)은 현재 상태가 지속된다면 2030년까지 독일 산업생산 능력의 20%가 사라질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구조조정 수요가 몰리면서 컨설팅 업체들이 고객들의 의뢰를 거절하는 상황이다. 실업에 대해 불안감을 느낀 독일 국민은 소득의 11.1%를 저축하고 있는데 이는 미국의 2배 수준이다. 저축 증가에 따라 소비가 감소하면서 경기는 더욱 침체되고 있다.
압도적인 경쟁력을 자랑하던 독일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된 원인으로 높은 법인세와 노동비용, 과도한 규제와 관료주의, 노동력 부족과 인프라 노후화 등 다양한 원인이 지목되고 있다. 여기에 더해 독일로부터 각종 자본재를 수입하던 중국이 경쟁자로 변모하면서 안정적인 수익을 올리던 시장을 상실한 것도 큰 원인이다. 하지만 독일 기업들은 무엇보다도 높은 에너지 비용이 가장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가스 가격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보다 3배나 올랐고, 유럽에서 가장 비싼 전기요금을 부담하는 상황에서 경쟁력 유지는 불가능하다.
독일 산업계의 다급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AfD를 제외한 나머지 정당들의 에너지 공약은 느긋하게만 느껴진다. 양대 정당인 기민련과 사민당은 2038년까지 전체 석탄 화력발전소를 폐쇄하고 2045년까지 탄소 중립을 달성한다는 목표에 동의하고 있다. 원자력 발전에 대해 사민당과 녹색당은 기존의 탈원전 정책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 비해 기민련은 전문가의 재검토를 통해 폐쇄된 원전의 재가동을 검토할 수 있다는 정도가 차이점이다.
이들과 달리 반이슬람주의, 반이민주의를 표방하면서 지지율 2위를 유지하고 있는 AfD의 에너지 공약은 화끈하다. AfD는 인간이 기후변화를 초래했다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당연히 기후변화와 관련한 모든 정책과 예산 그리고 관련 세금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AfD는 재생에너지, 특히 풍력발전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하고 있다. 풍력발전은 대규모 토지를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전력 공급이 안정적이지 않아 독일의 제조업을 망가뜨리고 있다고 비난을 퍼붓고 있다. 무엇보다도 러시아로부터의 가스 공급이 중단되는 상황에서 원전을 폐쇄한 것은 잘못된 조치라고 비난하면서 원전 재가동 및 신규 원전 건설을 주장하고 있다. AfD는 독일 제조업이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시 러시아로부터 천연가스를 도입해야 하며, 신규 석탄발전소 건설도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AfD의 이런 공세에 대해 차기 총리로 유력한 프리드리히 메르츠 기민련 당수는 자신이 총리가 된다면 독일 전력망 개혁과 더불어 최소 50개의 천연가스 발전소를 신규로 건설하여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달성할 것임을 강조했다. 문제는 러시아로부터의 가스 공급이 중단된 상태에서 어디에서 저렴한 천연가스를 확보할 것인가이다. 메르츠 당수는 카타르에 이어 미국산 LNG에 대해서도 장기 도입 계약 체결을 한다면 가격을 낮출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당장은 아니지만 러시아 가스 재도입 가능성을 검토해볼 수도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2026년까지 모든 러시아산 화석연료 수입을 중단한다는 유럽연합(EU)의 목표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독일이 러시아 가스 재도입 가능성을 내비치자 헝가리와 슬로바키아는 당장 러시아로부터의 천연가스 도입을 재개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하고 나섰다. 양국은 천연가스 공급을 전적으로 러시아에 의존해왔다. 이들은 러시아에 가스 재도입에 따른 안정적인 수익을 약속해야 우크라이나 휴전 협상이 원활하게 진행될 것이며, 협상 타결 이후에도 휴전을 준수할 것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 이에 대해 폴란드를 비롯한 스웨덴, 체코 등 10국은 러시아에서 계속 도입되고 있는 액화천연가스(LNG)에 대한 전면적인 수입 금지 등의 조치를 요구하고 나섰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끝이 보이기 시작하자 러시아 천연가스를 어떻게 할 것인지가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연합의 과제로 다시 부상하고 있다. 저렴한 에너지가 제공하는 경쟁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현실론이 점차 강해지고 있는 것이다.
2000년부터 독일이 추진해 온 에너지 전환 정책은 인류가 나아갈 길을 제시해주는 것으로 여겨졌다. 제조업을 주축으로 하는 독일이 할 수 있다면 대한민국도 당연히 에너지 전환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지식인들은 독일을 선의 상징으로 여겼고, 현실적 제약으로 머뭇거리는 우리를 악당으로 비난했다. 비싼 비용을 부담하는 독일 국민들을 부러워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풍력터빈과 태양광 패널 뒤에는 여전히 20%가 넘는 석탄화력발전과 대규모 러시아산 천연가스의 존재가 있었다. 내 눈앞에 송전선로가 들어서는 것을 싫어하고 반대하는 것은 우리와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힘을 합해 기후변화와 같은 인류 공통의 문제를 해결하자는 다자간 시스템은 급속하게 붕괴하고 있다. 기존의 약속은 헌신짝처럼 버려지고 있다. 미국과 러시아가 당사자인 우크라이나를 배제하고 휴전 협상에 나서고 있는 것이 상징적이다. 강대국이 세계를 나눠 가지던 19세기 제국주의의 모습이 21세기에 다시 등장하고 있다. 일관성을 지키는 것이 위험을 키우는 시대가 되고 있다. 혼란스러운 정국으로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이 확정되지 못한 상황이 우리에게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에 필요한 에너지 정책은 무엇이 되어야 할지 제로베이스에서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독일 배전망, 800여 중소형 업체가 담당… 980조원 들여 전력망 손본다
전력망은 송전망과 배전망으로 구분된다. 송전은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를 변전소로 보내는 것을 의미하고 배전은 변전소에서 최종 소비처에 공급하는 것을 가리킨다. 과거 소수의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력을 소비처에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역할만 하던 배전망은 이제 수많은 재생에너지 발전 시설에서 생산된 전력을 송전망으로 보내는 일도 겸하게 되었다. 전력망 관리가 과거보다 훨씬 복잡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한국전력이 송·배전망을 독점하여 관리하지만 독일의 경우 송전망은 4개 대형 업체가, 배전망은 866개 업체가 담당하고 있다. 배전 업체 가운데 3만 가구 이상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는 99개에 불과하다. 과거 지자체가 주민들에게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만든 소규모 업체들이 다수 존재하는 것이 독일 배전망의 특징이다. 그러다 보니 500개 이상의 각기 다른 시스템이 사용되고 있고 투자 여력은 부족하다. 재생에너지 확대에 걸맞은 디지털 시스템으로의 전환이 지연되면서 전력망 관리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전력망 건설 및 확충에 소요되는 비용을 전체 소비자가 분담하는 구조지만 독일의 경우 지역별로 분담하고 있어 재생에너지 발전이 증가하는 지역이 더 높은 전력망 사용 요금을 부담하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되어 왔다. 전력 공급을 통제하기 어려운 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아지면서 수요에 비해 전력공급이 훨씬 더 많아 전력요금이 0 또는 마이너스를 기록하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다. 수요와 공급이 실시간으로 일치해야 하는 전력망에 큰 부하가 걸리고 있는 것이다.
독일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24년에 전력망 확장, 전력 시스템 현대화, 전력 시장 개혁을 포함한 전력망 개혁 방안을 발표했다. 2045년까지 전력망 확충에 6500억 유로(약 980조원)를 투입하고 전력망과 관련된 인허가 절차를 간소화하고 승인 절차를 단축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송전선로 건설에 따른 민원을 예방하기 위해 지하로 송전선로를 구축하고 전력망 사용 요금 분산을 통한 인하, 수요 공급에 따른 전력요금 변화 등을 통해 재생에너지 비중 확대를 뒷받침 하도록 하였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독일 역시 전력망에 대한 고민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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