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나이가 어린 것과는 상관없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나의 정신세계를 사랑한다고, 나에게 천재 수준의 감수성이 있고 글쓰기에 특출한 재능이 있다고, 나와는 얘기가 통한다고,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다고, 내 마음 깊은 곳에 어두운 로맨스가 도사리고 있는데, 자기 내면에도 똑같은 감성이 있다고, 내가 나타날 때까지 어느 누구도 그 어두운 내면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내 운명이겠지.” 그가 말했다. “마침내 영혼의 짝을 만났는데, 열다섯 살이라니.”
- 케이트 엘리자베스 러셀 ‘마이 다크 버네사’ 중에서
열다섯 살의 버네사는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녀는 영어 선생님 스트레인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마흔두 살의 그도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녀가 똑똑하고 아름답고 남들과 다르다고, 자기를 이해하는 것은 세상에서 오직 그녀뿐이라고 말했다. 그들 관계를 주도하는 건 버네사라고, 그녀가 두 사람의 일을 결정하는 거라고 스트레인은 몇 번이나 확인했었다.
17년 후, 스트레인은 미성년자 성추행 혐의로 고발당한다. 어렸을 때 그에게 추행당했다고 주장하는 피해자들이 나타나고, 그들은 버네사에게도 증인이 되라고 요구한다. 그녀는 두렵다. 스트레인이 어렸던 자신을 조종하고 길들였다는 것을 시인하면 사랑이라 믿었던 모든 것은 학대가 되고 폭력이 된다.
어떤 관계는 지나고 나서야 명확해진다. 처음에는 빛나 보이던 것이 시간이 흐르면 검은 그늘을 드리운다. 버네사는 뒤늦게 깨닫는다. 축복 같던 그의 고백이 족쇄였다는 것을, 그녀를 독점하기 위해, 그 스스로가 정당하다고 믿기 위해 뱉어진 말들이었다는 것을, 그 결과 점점 더 그에게 의지하게 됐다는 사실을 힘들게 받아들인다.
사랑과 폭력의 경계는 어디쯤일까, 소설은 묻는다. 자기 욕구 충족이 앞설 때 사랑은 가면을 쓴 폭력이 된다. 더구나 사랑이란 이름으로 자아가 완성되지 않은 미성년자의 현재와 미래를 훼손하는 것은 추악하고 비열한 범죄다. 버네사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해야 했다. 그녀는 어둠을 바라보고 또 바라본다. 진짜 영혼의 짝은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의존하는 대신 동등하게 마주 보는 관계라는 걸 깨달을 때까지. 사랑이란 함께 성장해 가는 시간이라는 걸 수긍할 때까지. 오랫동안 그에게서 빼앗기고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아 스스로 일어설 수 있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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