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에서 변호사로 전직하면서 생긴 즐거움 중 하나는, 바로 출장이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검사의 직무는 의외로 무척 정적이다. 대부분 시간을 검사실에 틀어박혀 산더미 같은 기록에 묻혀서 보낸다. 반면 변호사는 활동 지역이 제한되지 않기 때문에 재판, 검찰 조사, 경찰 조사, 의뢰인 상담, 때로는 현장 확인을 위해 전국을 누빌 수 있다. 신기한 걸 구경하고 맛있는 걸 먹는 걸 좋아하는 나는 출장을 더없는 도락으로 여긴다. 그런데 갈수록 지역 명소와 명물이라는 것은 다 비슷해지고 비싸지는 탓에, 이 소박한 도락을 즐기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장기 휴가를 내기 어려운 사회 초년생 시절, 제주도는 내게 최고의 여행지였다. 10년 전 남자 친구, 현 남편과 충동적으로 여행을 떠났을 때가 지금도 생생하다. 태풍을 만나 게스트하우스 문짝이 눈앞에서 날아가는 엄청난 경험을 하면서도, 사장님이 양철 냄비에 끓여준 딱새우 라면에 모든 공포를 잊었다. 고삐 하나만 달랑 맨 말을 타고 해변 언덕을 자유롭게 질주하는 승마 체험도, 동네 노인 분들과 어울려 뻘쭘하게 노천욕을 즐겼던 바다 목욕탕도 어찌나 재미있던지.
그러나 몇 년 전부터 제주도 출장을 가더라도 얌전히 숙소에만 있다가 돌아오게 됐다. 살벌한 물가 탓이다. 유명한 동문시장 갈치조림을 한 번 먹으려면 5만원은 거뜬히 들고, 그나마도 1인분은 주문조차 안 받아준다. 말 한 번 타고 뒤뜰 한 바퀴 돌면 또 5만원이 사라진다. 저번 제주 출장에서는 공항 빵집에서 한정판 쿠키 한 상자를 집어 들었는데, 2만원 가까이 되는 가격에 뜨악하며 도로 내려놓기도 했다.
상권을 활성화한다는 명목으로 고유한 색깔을 없애버리는 것도 문제다. 도대체 왜, 지역 시장이나 축제 기획자들은 멀쩡한 가게들을 소위 ‘인스타 감성’으로 뜯어고치고, 대충 종이로 얼기설기 오려 붙인 ‘포토 스팟’을 만드는 걸까. 영어로 된 제품명과 설명을 붙이고 가격을 2~3배로 올리면 젊은 손님들이 몰려들 거라고 믿는 걸까. 우리 법률사무소 건물 아래층에서 팔고 있는 튀르키예 디저트 ‘카이막’과 ‘두바이 초콜릿’을 KTX 타고 세 시간 달려간 곳에서 완전히 똑같이 팔고 있는 걸 보면 구매 의욕이 뚝 떨어진다. 특히 무슨 빵, 무슨 샌드, 무슨 버거는 대동여지도를 그려도 될 정도로 흔하다.
젊은 소비자들은 새롭고 특이한 걸 선호한다. 진짜 맛과 가성비를 추구한다. 충남 예산 시장에 들렀을 때, 번호표까지 끊어서 대기할 정도로 인기 있던 애플파이보다 훨씬 감동적이었던 건, 광장 노상에 가스 버너를 가져다 두고 직접 구워 먹는 ‘도래창’과 ‘뒷고기’였다. 고기 맛도 물론 좋았지만, 그 시장의 공기, 분위기, 풍경이 더 좋았다.
출장객도, 여행객도, 블로거도 유튜버도 원하는 건 같다. ‘그곳이기에’ ‘그곳에서만 먹을 수 있는’ ‘그곳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나선다. “출장요? 제가 가겠습니다”를 씩씩하게 외치게 하는 곳들. 부산 차이나타운에서 파는 산둥식 만두, 드라큘라 한 떼를 몰살시키고도 남을 양의 마늘을 듬뿍 때려 넣은 의성 닭갈비, 산처럼 수북이 쌓인 미나리와 함께 먹어 치우는 광주 오리탕, 일본의 딸기모찌가 울고 갈 공주의 알밤모찌, 아름다운 순천만 국가정원을 거닐며 떠먹는 갈대 아이스크림. 내가 너무도 사랑하는 것들이 오래오래 알려지고 사랑받고 또 지켜지기를 바라며, 오늘도 ‘고독한 미식가’ 아닌 ‘고독한 변호사’는 출장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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