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귀찜을 좋아한다. 지난주 글에도 “이 집 아귀찜 맛있네”를 감탄할 때 쓰는 말의 예로 들었다. 아귀찜에 집착하는 이유가 있다. 마산 출신이라 그런다. 아귀찜은 마산에서 발명된 음식이다. 서울에도 ‘마산 아귀찜’이라는 가게가 많은 이유다.
서울의 어떤 ‘마산 아귀찜’에서 아귀찜을 처음 먹었을 때가 기억난다. 화가 났다. 그건 아귀찜일 수는 있지만 마산 아귀찜은 아니었다. 마산 아귀찜은 생아귀가 아니라 건아귀로 만든다. 전분을 넣지 않아 걸쭉하지도 않다. 혀가 계엄을 선포할 만큼 맵다.
요즘 사람들은 마산 아귀찜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건아귀찜은 콤콤하다. 잠깐. 아무래도 콤콤하다는 표준어가 아닌 것 같아 찾아봤다. 아니다. 사투리다. 콤콤하다는 건 맛이 약간 우리하다는 뜻이다. 잠깐. 우리하다도 표준어가 아니다. 우리하다는 약간 아린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맛이 아린다는 말이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다시 설명하겠다. 콤콤하다는 치즈처럼 발효한 음식을 먹을 때 쓸 법한 말이다. 오래 묵히거나 삭혀서 꼬릿한 맛이다. 잠깐. 꼬릿하다도 표준어가 맞나? 또 찾아봤다. 이것도 표준어가 아니다. 대체 서울 사람들은 콤콤하고 우리하고 꼬릿할 때 무슨 말을 쓰는가. 구리다?
나는 서울말을 쓴다. 경상도 남자는 사투리 못 고친다는 편견을 없애려고 고쳤다. 거짓말이다. 어릴 때는 서울말이 세련되게 들렸다. 세련된 말을 하는 세련된 서울 사람이 되고 싶었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언어는 인간 정신을 만드는 근원적 요소 중 하나다. 언어를 고친다고 촌놈이 정신까지 세련된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내 정신은 콤콤한 걸 먹으면 콤콤하다는 말을 바로 떠올린다. 세련될 수가 없다. 사실 나는 세련되다고 쓰면서도 머릿속으로는 깔롱지다고 말하는 중이다.
콤콤한 맛이 궁금하면 마산에 가시라. 오동동에 가면 아귀찜 가게가 줄을 잇는다. 할매집, 아구할매집, 원조할매집, 진짜할매집 등등 할매, 아니 할머니가 너무 많다. 원조 할매, 아니 할머니는 다 돌아가셨다. 그래도 마산의 ‘아구찜’, 아니 아귀찜은 아직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