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3년 시노하라(篠原) 사건은 간첩법 개정을 촉발한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진다. 일본 후지TV 서울지국장이었던 시노하라는 국방정보본부 소속 고영철 해군 소령을 포섭했다. 진급 누락에 불만을 가진 고 소령과 시노하라는 본격적인 스파이 활동을 전개했다. 3년 동안 각종 군사 시설과 병력 배치 현황 등을 촬영한 슬라이드 170여 장과 국방부 비밀문서 50여 건을 일본 대사관 무관에 넘겼다.
3년에 걸친 대담한 절도 행위는 마침내 꼬리가 잡혔다. 고영철은 군사기밀보호법 위반으로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고, 시노하라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형을 선고받고 추방됐다.
당시 시노하라 사건에 연루된 이들에겐 형법 98조에 따른 간첩죄가 적용되지 않았다. 북한을 의미하는 ‘적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부와 국회는 간첩의 본질을 직시하지 않고 형법 개정에 나서지 않았다. 그 결과, 한국은 처벌 걱정 없이 스파이들이 활동할 수 있는 환경, 그야말로 ‘스파이 천국’으로 변해갔다.
지난해 6월 중국인 2명이 부산 해작사에 입항한 미국 항공모함을 드론으로 불법 촬영하다가 적발됐다. 11월에는 또 다른 중국 국적 40대 남성이 내곡동 국정원 건물을 촬영하다가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부산에서 미국 항모를 드론으로 촬영한 중국인 3명은 2년 전부터 500여 군사 시설을 찍어온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모두 중국계 이민자, 관광객, 유학생 신분을 내세우고 ‘단순 호기심’이라고 주장하며 한국의 허술한 법망을 피했다.
지난해 국군정보사 소속 군무원은 1억6000만원을 받고 중국 동포에게 군사 기밀을 유출했지만 간첩죄로는 처벌하지 못했다. 지난 2022년 송파구 중식당은 중국의 비밀 경찰서로 드러났지만, 중국 주인은 업무상 횡령 혐의만 인정됐다. 4조3000억원 상당의 첨단 기술을 중국에 유출한 전 대기업 임원은 산업 스파이임에도 부정경쟁방지법 위반으로만 송치됐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국 중 간첩죄를 적국에만 한정한 나라는 대한민국뿐이다.
중국은 형법 제110조에 간첩죄 조항을 포함하고 있지만 2023년 반(反)간첩법 개정을 통해 제3국을 겨냥한 간첩 활동에 대해서도 처벌하고 있다. ‘국가를 배신하도록 선동·유혹·매수’하는 행위까지도 처벌 대상에 포함하는 등 이현령비현령식이다.
중국 국가안전부(MSS)는 지난해 5월 회사 근무 당시 반도체 관련 정보를 한국으로 유출했다는 혐의로 한국 교민을 반간첩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탈북자를 지원하던 한국인 선교사를 간첩 혐의로 체포했다. 미국 간첩법(Espionage act)은 미국에 해를 끼치거나 적을 도울 수 있는 국방 관련 정보를 무단으로 공개하는 행위를 모두 범죄로 규정했다. 검사가 기소에 유리하게 간첩 행위를 포괄적으로 규정해 스파이가 빠져나갈 구멍을 최소화한 것이다.
국정원 요원들과 접촉하다 체포된 한국계 대북 전문가 수미 테리는 외국대리인등록법(FARA) 위반 혐의였다. 일본도 지난 2013년 ‘특별비밀보호법’을 제정해 간첩 행위에 대해 ‘적국’과 ‘외국’을 구분하지 않고 처벌한다. 필리핀은 지난 1월 불법으로 군사 정보를 수집해 국가 안보를 위협한 중국인 간첩 5명과 각종 군사 시설 등을 불법 촬영한 중국 소프트웨어 기술자를 체포했다. 독일 또한 형법 제94조를 통해 ‘타국’에 이익을 제공하기 위해 국가 기밀을 권한 없는 자에게 전달하거나 고표하는 행위는 처벌하고 있다.
1953년 정전 협정 체결로부터 불과 한 달여 뒤에 제정된 한국 형법의 간첩죄는 72년째 토씨 하나 바뀌지 않고 있다. 강산이 여러 번 바뀌면서 한국은 빼내야 할 정보가 많은 부자 나라가 되었고, 간첩질의 최우선 대상국이 됐다. 조문상 ‘적국’을 ‘외국 및 외국인 단체’로 고치는 개정안이 지난 2004년부터 발의됐지만, 정쟁 속에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못한 채 번번이 폐기 수순을 밟았다.
22대 국회는 군 정보사 기밀 유출 사건을 계기로 정치권에서 개정안 논의가 활발하다. 여야는 각각 다양한 간첩법 개정안 18건을 발의했다.
지난해 11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소위가 형법 일부 개정 법률안을 의결했다. 하지만 간첩 처벌 범위를 ‘북한’에서 ‘외국’으로 넓히자는 형법 개정안은 표류하고 있다. 야당이 돌연 반대 입장으로 선회하여 개정안을 법사위 전체 회의에 아예 올리지 않고 있다. 일부 강성 재야 단체의 요구에 동조해 ‘국정원 권한 남용으로 간첩 혐의자를 양산하고 민간 사찰 등 인권 침해가 우려된다’며 복지부동이다. 계엄을 빌미로 뜬금없이 공청회 등을 개최해 여론을 더 수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공(對共) 수사권이 경찰로 이관돼 국정원은 사실상 식물 기관이 됐다. 그러나 야당은 인권 침해 가능성을 이유로 개정 논의를 지연시키는 ‘침대 축구’ 전술을 펼치고 있다. 야당 내에 국정원장, 차장, 기조실장 출신 인사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사권이 없는 국정원을 내세워 재야 단체의 주장에 동조하는 것은 자기모순적인 행태다.
최근 간첩 활동 혐의로 대법원에서 2~5년의 형이 확정된 ‘자주통일 충북동지회’ 사건조차 간첩죄가 적용되지 않았다. 이들은 2017년 북한 문화교류국 공작원에 포섭되어 4년간 국가 기밀을 유출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자유 민주 질서에 해악을 끼칠 위험은 인정하면서도 간첩죄는 무죄로 판단했다. 수집한 정보가 국가 기밀이 아니라는 주장은 OECD 국가에서는 상상할 수 없다.
격변하는 세계 질서 속에서 외국과 적국의 구분은 가변적이고 상대적일 뿐이다. 이제라도 간첩법을 개정해 우리 국민과 국익을 지키는 최소한의 법적 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 “간첩법 개정을 미루는 자가 간첩”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