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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터 연합뉴스

마이크 던리비 미국 알래스카 주지사가 이번 주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산업통상부 장관을 비롯해 다수의 대기업 관계자들과 연이어 면담을 하는 바쁜 일정이었다. 던리비 주지사는 지난 19일부터 우리나라 외에도 대만, 일본, 태국을 잇따라 방문 중이다. 알래스카는 인구가 고작 75만명이다. 그래도 대만은 라이 총통이 면담에 나서며 예우를 다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대리인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정다운

트럼프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가 시작된 이후 여러 국가들이 미국의 눈치를 보고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대미 무역 흑자를 기록하고 있는 국가들에 대해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이걸 무기로 대미 무역 흑자를 줄이고 미국에 대규모 투자를 해서 일자리를 창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기업들은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대만 TSMC가 1000억달러를 투자한다고 했다. 이어서 현대자동차도 백악관에서 210억달러의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그래픽=양진경

대규모 대미 투자 발표가 이어지면서 이제 초점은 대미 무역 흑자 축소로 넘어가고 있다. 무역 흑자 축소를 위해서는 미국에 더 적게 수출하거나 미국으로부터 더 많이 수입해야 한다. 미국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더 많이 사 와야 하는 입장에서 가장 선호되는 것은 액화천연가스(LNG)다. 어차피 어디에선가는 수입해야 하는 에너지 자원이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중동이나 호주에서 들여오는 것보다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미국산 LNG의 운송 비용이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상황이 아니라고 다들 생각하고 있다. 여러 국가들이 앞다퉈 미국산 LNG 수입 확대와 알래스카를 비롯한 다양한 미국 LNG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 의향을 밝히고 있는 배경이다.

10년 전만 해도 미국산 LNG 수입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미국이 LNG 순수입국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LNG 수입은 1995년부터 급속히 확대됐다. 증가하는 미국 내 천연가스 수요를 국내 생산분이나 멕시코 수입 물량으로 충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2004년 미국의 수입량은 1995년 대비 27배 폭증할 정도였다. 이 무렵에는 미국이 장기적인 천연가스 공급난에 빠질 것이라는 예측이 현실이 되는 것 같았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던 레바논 출신의 샤리프 수키라는 사업가가 있었다. LA에서 고급 레스토랑을 운영하던 수키는 LNG 수입을 위한 대규모 터미널을 건설하면 큰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수키가 설립한 소규모 기업인 체니에르는 20억달러를 조달했고, 텍사스 지역에 LNG 수입 시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공사 중에도 미국의 천연가스 가격은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하지만 2007년 준공이 다가오면서 수키는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픽=양진경

미국 내 셰일가스 생산이 급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른바 ‘셰일 혁명’으로 국내 수요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천연가스가 생산되기 시작했다. 방대한 생산량을 해결하려면 수출을 통해 활로를 모색해야 했다. 하지만 대서양과 태평양으로 둘러싸인 미국이 파이프라인을 통해 천연가스를 수출할 수는 없었다. 유일한 대안은 LNG였다. 그러나 당시 미국에는 대규모 천연가스 액화 시설이 없었다. 20억달러를 투자해 LNG 수입 터미널을 준공했지만 수익을 올릴 가능성이 없어진 수키에게 셰일 업체들은 완공된 LNG 수입 시설을 수출용 시설로 개조해줄 것을 요청했다. 액체 상태의 LNG를 기체 상태로 만드는 것보다 기체 상태의 천연가스를 액체로 만들기 위해서는 훨씬 비싸고 복잡한 시설이 필요하다. 수키는 80억달러 이상의 비용이 추가되는 모험을 하기로 결심했다. 에너지 전문가들이 미국이 LNG를 수출할 확률보다 7월에 뉴욕에서 눈이 올 가능성이 더 높다고 비아냥거릴 정도로 성공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하지만 LNG 수출 터미널이 본격적으로 가동을 시작한 2016년부터 미국의 LNG 수출은 본격화됐다.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석탄을 대체할 연료로 천연가스 수요가 세계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2020년 LNG 수출 규모는 불과 4년 전인 2016년 대비 10배 이상 급증했다.

그래픽=양진경

미국의 LNG 수출은 탄탄대로를 달렸다. 2022년 2월 유럽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러시아로부터의 천연가스 공급이 감소하자 미국산 LNG 수입 확대에 나섰다. 유럽에서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2023년 미국은 호주와 카타르를 제치고 세계 최대 LNG 수출 국가가 됐다. 미국산 LNG를 도입하는 국가는 2016년 17국이었지만, 2023년에는 43국으로 확대됐다.

대규모 LNG 수출이 가능해지자 미국은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국가에 우선적으로 수출한다는 정책을 수립했다. 그래서 한국은 다른 나라보다 빠르게 대규모로 미국산 LNG를 수입하기 시작했다. 한국가스공사는 2012년 대규모로 천연가스를 도입한다는 장기 계약을 체결하고 2017년부터 본격적으로 미국산 LNG를 수입하기 시작했다. 뒤이어 국내 민간 기업들도 미국산 LNG 도입을 급속히 늘렸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2019년부터 3년 연속 미국산 LNG를 가장 많이 수입하는 나라였다. 이후에도 미국 LNG를 많이 들여오는 상위 5국에 꾸준히 포함되고 있다. 미국 LNG 수출 확대에 대한민국이 큰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시장 원리에 따라 작동하는 미국산 LNG는 파이프라인으로 공급되는 경직된 러시아 천연가스와 대비됐다. 정치적 논리가 아닌 경제적 이익에 따라 유연하게 공급량과 가격이 조정되고 목적지를 변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산 LNG는 미국의 자유정신과 시장주의를 상징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가 시작된 이후 모든 것이 변화하고 있다. 이제 미국산 LNG는 정치적 압력에 따라 강제로 구매해야 하는 대상이 되고 있다. 단기적으로 미국 LNG에 대한 수요는 증가하겠지만 이것이 중장기적으로 미국의 에너지 산업과 수입국 모두에 도움이 될 것인지는 의문이다. 더 많은 미국산 LNG의 도입과 알래스카 LNG 프로젝트 참여라는 선택지를 받아든 우리로서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아니 선택할 권리가 있는지에 대한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의외로 오래된 한국·알래스카의 인연… 1970년대부터 가스관 사업 참여 시도

트럼프 대통령의 언급으로 관심을 모은 알래스카 LNG 개발 프로젝트는 50년 넘게 추진과 중단을 반복하고 있다. 알래스카는 오랫동안 주도 앵커리지를 중심으로 남부 지역에서 가스를 생산하여 사용해왔다. 하지만 최근 가스가 고갈되면서 북부 지역의 가스를 가스관을 통해 공급받지 못하면 조만간 외부로부터 LNG를 수입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가깝고 대규모 LNG 시장을 보유한 동아시아 국가의 투자를 원하고 있는 이유이다.

동아시아 국가 가운데 일본과 알래스카의 인연은 깊고 오래됐다. 1950년대 후반부터 미국 기업으로부터 LNG 도입 제안을 받아오던 일본은 1960년대 초 대기오염으로 인한 문제 해결을 위해 친환경 발전용 연료로 LNG 도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당시 알래스카에서는 천연가스가 넘쳐났지만 수요가 없는 상황이었고 일본은 비용 문제로 최대한 가까운 곳에서 LNG를 도입하기를 희망했다. 양측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면서 2개 미국 기업이 공동으로 알래스카 남부 니키스키 지역에 켄나이 LNG 생산 설비를 1969년 준공했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LNG가 그해 일본에 도착한 것이 일본 최초의 LNG 도입이었다. 켄나이 LNG 설비는 이후 50년 동안 미국 유일의 LNG 수출 시설로서 일본에 천연가스를 공급해왔다.

알래스카와 우리나라의 인연도 의외로 오래됐다. 1978년 국내 건설업체들은 당시 추진되던 알래스카 가스관 건설 사업에 참여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1979년에는 한일 의원연맹 차원에서 알래스카 에너지 개발 참여를 위한 양국 간 협의를 진행하기도 했다. 1984년에는 한국, 일본, 대만 3국에 알래스카 천연가스 사업에 투자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이에 국내 7대 그룹은 컨소시엄을 구성하고 현지에 실무팀을 파견하여 사업성 검토에 나서기도 했다. 1992년에는 당시 동력자원부가 알래스카 북부에서 가스전을 개발해 1997년 이후 연간 200만톤씩 들여오는 방침을 수립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