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부를 시켜놓고
바닷가 허름한 두붓집
벚꽃이 피기 전에 모두부를 시켜놓고
나는 파도를 보네 어디로 갔을까
해변의 젖은 발자국들을 보네
막 일어서는 파도도 좋고
꽃이 필 사월도 좋지만 나는
다정한 모두부의 윤곽을 더 사랑하네
모두부의 비밀은 자르기 전에도
눈물겹도록 알 수가 있네
-심재휘(1963-)
시인은 좀 낡고 헌 듯한 두붓집에 앉아 있다. 벚나무엔 꽃망울이 맺혀 꽃이 필 기세다. 시인은 모두부를 시켜놓고 바다를 바라본다. 모래사장은 밀려와 부서지는 파도 때문에 젖어 있고, 그 위에는 발자국이 어지럽다. 그러나 오가는 사람은 없다. 시인은 저편에 파도가 생겨나는 것에 눈길이 간다. 파도에는 높낮이가 있고, 격렬함이 있지만, 저 파도는 곧 해안에 닿아 무너질 파도이다. 규칙적인 율동 같은 것이 있는, 일어서고 주저앉는 파도를 계속 본다.
수시로 바뀌는 감정이나 매일의 생활도 파도와 같고, 개화와 낙화도 파도와 같은 것일 테다. 그렇다면 모두부는 어떠한가. 야들야들하고 보드랍고 무르지만, 선(線)의 끝이 만나는 귀퉁이는 반듯하다. 모두부는 잘라도 겉과 속이 다르지 않다. 어림짐작할 수 있다.
이 시를 통해 불확실한 것과 비교적 명료한 것, 어떤 일의 선후와 시말(始末), 완만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등등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시인은 다른 시에서 “길어야 열흘도 안 되는/ 꽃 피고 꽃 지는 벚나무 아래를/ 나는 좀 느려도 돼”라고 노래했는데, 이 시를 읽고 난 후엔 훨씬 고요해지고 차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