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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박상훈

‘미래의 혈액 부채(負債)가 몰려온다.’ 지난해 인구통계학자인 고려대학교의 김오석 교수와 함께 발표한 논문 제목이다. 고령화로 우리 사회의 면면이 지금과 크게 달라질 것이라는 예상은 이제 진부하기까지 하다. 당장의 변화가 피부에 와닿지 않기에, 중장기적인 국가 체계를 어떤 식으로 변화시켜 미래를 대비해야 할지에 대한 논의는 쉽게 진전되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 안일한 생각으로 미래를 바라보는 이들이라도, 혈액(피)처럼 구체적으로 눈에 보이는 문제를 떠올리면 생각이 달라질 수 있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레 여러 질병을 앓는다. 수술을 포함하여 수혈이 필요한 여러 의학적 문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피, 즉 혈액 제제는 70대 인구에게 가장 많이 필요하다. 국가 의료비가 고령층에게 집중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원리다.

그런데 헌혈은 젊고 건강한 사람이 주로 참여한다. 대한민국의 혈액 공급은 전적으로 국민들의 자발적 헌혈에 의존해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저출산 여파로 헌혈 가능한 젊은 인구가 급감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대한적십자사 통계에 따르면, 실제 연간 헌혈 건수는 2017년 약 270만건에서 2022년 240만건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5년 사이 약 10% 감소한 것으로, 인구 감소와 고령화에 따른 잠재 헌혈자 부족이 현실화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래픽=박상훈

현재 헌혈 상한 연령은 70세로 고정되어 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 최근까지의 연령별 혈액 수요 공급 자료를 미래의 인구 구조 변화와 함께 계산하면 국가 차원의 피 부족 사태가 앞으로 얼마나 심각해질 것인지 예측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현재대로 헌혈 상한 연령이 유지되는 것을 전제로 계산했을 때, 앞으로 20년간 피 공급은 35.5% 감소하지만, 피 수요는 29.5% 증가한다. 지금(2025년)과 비교해 보면 20년 뒤에는 혈액이 필요한 두 명 중 얼추 한 명 정도만 피를 구할 수 있는 정도가 된다.

아직까지 사람의 피를 대신할 수 있는 인공 혈액은 개발되지 않았다. 혈액은 다른 나라에서 수입해 오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디스토피아(암울한 미래상)를 떠올린다. 최악의 시나리오로, 젊은 세대에게 헌혈을 사실상 강제하다시피 하는 사회적 압력이 생길 가능성도 있다. 헌혈 가능한 연령을 상향하는 문제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일정 나이 이하 국민에게 매년 6회씩 강제 헌혈제를 검토한다거나 헌혈 횟수에 따라 인센티브와 페널티를 부여하는 식의 논의가 나올 수도 있다. 헌혈의 집에서 생애 82번째 헌혈을 하며 떠올려 본 생각이다.

그 어떤 무시무시한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젊은 세대에게 헌혈을 강제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피 문제는 더 큰 이슈의 탐촉자, 또는 메타포일 수 있다.

같은 동역학을 가진 다른 문제를 살펴보자. 최근 국회에서는 18년 만에 여야 합의로 연금 개혁안이 도출되었다. 보험료율을 현행 9%에서 향후 8년에 걸쳐 13%까지 단계적으로 인상하고, 소득 대체율을 40%에서 43%로 상향하는 안이다. 물론 오랜 기간 거의 손대지 못했던 연금 구조를 손질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미는 있다.

하지만 정부의 재정 추계에 따르면, 이번 모수 개혁 조치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 기금 고갈 시점은 기존 2055년에서 2064년으로 고작 9년 정도 늦춰지는 데 그칠 것으로 전망된다. 구조적으로 청년 세대는 50% 가까이 높은 보험료를 은퇴 시점까지 부담해야 하지만, 은퇴가 임박한 장년층은 몇 년만 인상된 보험료를 견디면 연금을 수령할 수 있다.

유년층은 더 문제다. 평생 높은 보험료를 내기만 하다가 국민연금 고갈이 현실화되었을 때에는 연금 수령을 위해 다음 세대에게 조세 부담을 전가할 수밖에 없다.

사회 변화에 따라 국민들의 실질적인 노쇠 정도 변화를 고려한 점진적인 노인 연령 기준 상향이나 자동 조정 장치의 도입 등 구조적 개혁은 어려운 현실이다. 지구를 향해 가까워지는 소행성이 뻔히 보이는데도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기 꺼리는 관료와 전문가들의 모습을 다룬 영화 ‘돈 룩 업’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정치인과 기술 관료가 큰 그림을 그려야 할 자리에, 대의 민주주의의 취약성만 남은 모습이다. 선거에서 표를 가진 현 세대의 이해관계가 정책에 우선 반영되면, 정작 미래 세대의 권익은 의제에서 은근슬쩍 사라진다. 인구 피라미드에서 가장 두꺼운 연령대가 가장 큰 이익을 보는 정책적, 정치적 의사 결정이 반복되는 것이다. 눈앞의 기성세대 유권자들의 반발을 사는 정책보다는, 당장의 정치적 부담을 줄이고 문제 해결을 미루는 미봉책이 반복된다. 이번 연금 개혁안을 두고 재정 고갈 시점을 조금 늦출 뿐, 결국 청년 세대에게 부담을 전가한다는 국회 내 지적이 나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문제는 이러한 양상의 부담 전가가 비단 연금에 그치지 않고 사회 전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인구 피라미드는 고려청자와 비슷한 모양에서 점차 ‘압정’과 유사한 극단적인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의료, 돌봄, 노동, 교통을 비롯하여 세대 간의 경제적 이전이 발생하는 모든 영역에서 시스템 작동 논리가 현재의 모습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다면, 수축 사회는 재정 적자를 지탱하기 어렵고 젊은 세대는 무거운 실효 세율을 감당하기 어렵다. 이는 마치 한 사람의 피를 여러 사람이 나눠 써야 하는 상황과 다를 바 없다.

인구 구조의 변화는 정해진 미래다. 하지만 제도가 인식, 고려하는 현실과 변화하는 실제 세상의 괴리는 빠르게 커져만 간다. 현재 기성세대의 이익을 위해 이 괴리를 좁히지 못하는 안일한 현실은 흡사 내년의 어획을 위해 꼭 남겨두어야만 하는 치어까지 당장의 이익을 위해 모두 쓸어 담는 어부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지금 당장의 편의를 위해 폭탄 돌리기를 지속한다면, 그 희생양은 태어나자마자 빚을 지는 아이들이 될 것이다. 반대로 미래 세대를 배려해 현재 세대가 어느 정도 고통 분담을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인구 구조 변화에 대응해 조금 더 나은 연착륙을 경험할 수 있다.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로 미래 세대의 목소리가 직접 들리지 않는다면, 현 세대의 통찰과 책임감으로 대신해야 한다. 눈앞에 닥친 인구 변화의 충격은 거스를 수 없다 해도, 분담의 방식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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