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를 쓴 올더스 헉슬리와 ’1984′의 조지 오웰은 영국 이튼스쿨에서 1년간 프랑스어를 가르치고 배운 사제지간이기도 하다. 조지 오웰, 본명 에릭 아서 블레어는 출간 후 예전 스승이자 선배 작가인 헉슬리에게 책을 한 권 보낸다. 헉슬리는 답장에서 이렇게 답한다.
“‘1984′의 악몽은 필연적으로 ‘멋진 신세계’와 훨씬 닮은 악몽으로 바뀌어 갈 거라네.”
요약하면 이런 것이다. 너는 틀리고, 내가 맞아. 두고 볼래? 이것을 헉슬리의 속좁음으로 폄하할지 아니면 자신감으로 해석할지는 후대 독자들의 몫이다. 미국의 사회 비평가 닐 포스트먼이 날카롭게 지적했듯, 오웰은 책을 금지하는 사회를 두려워했지만, 헉슬리는 아무도 책을 원하지 않아 굳이 금지할 이유가 없어지는 사회를 두려워했다. 오웰은 정보를 빼앗는 것을, 헉슬리는 너무 많은 정보가 주어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오웰은 두려움이 우리를 압도할까 봐 두려워했지만, 헉슬리는 욕망이 우리를 망칠까 봐 두려워했다.
정말로 수십 년이 지난 후 세계는 어떻게 되었을까? 한반도라는 땅만 놓고 보면 여기는 누가 옳다고 하기 어렵다. 위쪽엔 ’1984′의 세계가, 아래엔 ‘멋진 신세계’의 예언이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심지어 대한민국은 지난 몇 십 년 동안 스스로 ’1984′에서 ‘멋진 신세계’로 건너온 나라가 아닌가. 물론 코로나 시기처럼 ’1984′로 후진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작가들은 왜 이렇게 세상 망하는 일에 관심이 많죠? 언젠가 그런 질문을 들은 적이 있다. 디스토피아를 쓰는 작가들은 세상이 망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정확히 반대다. 망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피하고 막고 돌아가기 위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미래를 쓴다. 그 ‘인지적 지도’만이 우리가 손에 쥔 유일한 지도이며 마지막 무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