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는 무엇인가? “해양도(海洋道), 또는 해광도(海光道)로 봐야 됩니다.” 나주의 7000석 부자였고, 70칸의 고택인 ‘남파고택’의 주인이고, 나주의 걸어 다니는 도서관인 박경중(78) 선생의 대답이다.
영산강 때문이다. 나주 영산포까지 밀물 때면 강을 거슬러 바닷물이 들어왔다. 목포에서부터 6시간 동안 밀물이 들어온다. 이때 배를 타고 올라오면 아주 수월하게 영산포까지 도착한다. 썰물 때 맞춰 배를 타고 내려가면 특별히 노를 젓지 않더라도 빠른 속도로 목포까지 내려간다. 그래서 영산포는 항구였다. 나주는 전형적인 항시(港市), 항구 도시였던 것이다. 내륙 도시가 아니었다. 삼국시대까지는 이 영산강 물길이 나주 위로 올라가 광주까지 갔던 모양이다. 그때는 광주가 중심이었다. 배가 닿으니까. 그러다가 강물의 수위가 내려가면서 광주 밑의 나주까지만 화물선이 다닐 수 있었다.
나주의 반남 고분군과 복암리 고분은 마한(馬韓)의 부족국가 왕들의 무덤이었다. 이 고분들의 존재가 이 지역이 해상 교역으로 자본을 축적한 해상 왕국의 중심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영산강이 방조제로 차단되고 3000년 역사의 해상 교역이 사라진 나주는 이제 쇠락한 내륙 도시가 되었다. 일제 때까지만 해도 돈이 많이 돌았던 나주의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유물이 1913년에 세워진 ‘남평주조장’이다.
일제는 쌀이 많았던 이 지역에 돈을 투자해서 최고 시설의 주조장을 세웠다. 일본인 요코야마(橫山)라는 사람이 나주에 이민 와서 야심 차게 일급 주조장을 운영했던 것이다.
지금은 퇴락한 건물이지만 여기에는 근대 주조장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남아 있다. 2층 구조의 200여 평에는 애초부터 주조장에 특화된 건축 설계를 하였다는 점이 흥미롭다. 쌀 씻는 공간, 고두밥 찌는 증미실, 효모를 집어넣는 주모사입실, 발효실, 고두밥 식히는 냉각실(바닥이 1m 낮다), 쌀누룩을 배양하는 입국실, 원료 창고, 술 거르는 제성실, 알코올 도수를 체크하는 검사실, 회계 사무실 등이 체계적으로 갖춰져 있다.
2층에 올라가니까 숙직실이 있는데 다다미방으로 되어 있다. 성인 남자 가슴까지 키가 올라오는 370리터짜리 옹기 술독 9개도 독특하다. 주둥이 부분이 일반 옹기에 비해서 매우 두껍고 단단하다. 술이 발효가 되면서 가스가 차면 술독 주둥이 부분이 터질 수 있으므로 두껍게 특별 제조한 것이다. 마한 시대부터 토기 옹관(甕棺)을 제작하던 장인들의 솜씨가 면면이 이어진 술독이라는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