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4월 이야기'의 한 장면.

매년 4월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 ‘4월 이야기’를 본다. 따사로운 햇살, 살랑거리는 바람, 흩날리는 벚꽃 속에서 일본의 국민 배우 마쓰 다카코의 청초함이 반짝이는, 첫사랑의 풋풋함과 새 학기의 설렘을 담은 완벽한 청춘 영화다.

내용은 간단하다. 홋카이도의 시골 마을에 살던 한 여고생이 짝사랑하던 선배가 도쿄의 무사시노 대학에 진학했다는 소식을 듣고 열심히 공부해 같은 대학에 입학한다. 그렇게 상경해 도쿄의 봄날을 누리던 중, 그토록 동경하던 선배를 만나면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청춘의 꽃봉오리가 터지려는 순간, 청춘물이 늘 그러듯 하늘에선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망가진 빨간 우산을 쓴 마쓰 다카코 얼굴로도 유명한 포스터의 바로 그 장면이다.

그런데 같은 영화를 20회 이상 보다 보니 마쓰 다카코의 상기된 얼굴보다 비를 피하던 그녀에게 내민 어느 중년 신사의 우산이 점점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카멜색 슈트에 가죽 서류 가방을 든 멋진 신사의 고풍스러운 장우산은 스마트폰도, 메신저도 없던 시대 한 치 앞도 모를 청춘을 품어주는 어른의 품격과도 같았다. 만약 자동 우산이나 편의점에서 산 일회용 비닐 우산을 건넸다면 어땠을까. 마쓰 다카코의 망가진 빨간 우산이 어딘가 부족하고 미약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청춘의 이미지 그 자체로 쨍하게 다가오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신사라면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그림이 되고,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장우산을 갖고 다니자. 무채색 계열에 손잡이는 흔히 곡자라고 하는 둥근 나무 소재가 가장 적당하다. 영국, 이탈리아 등지에서 만드는 수십만 원대 제품도 좋지만, 플라스틱 티가 너무 나거나, 상호나 브랜드를 인쇄한 행사 상품이거나, 일자 손잡이 골프 우산만 피해도 충분하다.

엄숙한 분위기 속 기품 있는 장우산을 든 찰스 왕세자의 옆에서 바람에 뒤집힌 골프 우산과 사투를 벌이는 보리스 존슨 전 총리와 같은 해프닝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으면 말이다.

남자는 나이가 들수록 점점 편한 차림을 추구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아저씨가 되는 지름길이다. 쏟아지는 비를 보면서 자기 우산을 처음 본 학생에게 선뜻 내어준 영화 속 신사처럼, 장우산은 자잘한 불편 정도는 감내하는 여유와, 소중한 사람과 언제든 함께 쓸 수 있는 너른 품을 드러내는 남자의 물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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