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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500년 동안 유교가 키워내고자 했던 인격적 모델은 ‘청렴’과 ‘의리’였다. 나는 ‘청렴’에 자신이 없다. 안타깝게도 돈을 좋아해서 그 모델 인격의 경지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나 같은 유형의 인간이 돈 만지는 자리에 앉게 되면 불행이 시작된다. 천만다행으로 이제까지 돈 만지는 자리에 가보지 못했으니 하느님의 축복이다.

20년 전 안동의 보백당(寶白堂)에 우연히 갔다가 현판에 써진 ‘내 집에 보물은 없다. 보물이 있다면 청백뿐이다(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라는 글씨를 보았을 때 가슴이 뭉클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그동안 조선 선비를 대강대강 알고 있었구나!’ 전남 장성군 황룡면에 가면 아무 글자도 쓰여 있지 않은 비석인 백비(白碑)가 있다. ‘박수량 백비’다. 청백의 정신을 상징한다. 박수량이 고위 공직에 있었으나 장례 비용도 없는 상황을 보고 임금이 백비를 세워 주었다. 우리나라에서 매우 드문 백비가 아닌가 싶다.

‘TK 사부’라는 별명이 있는 유목기(92) 선생은 돈 만지는 자리에 계속 있었으면서도 그 공정한 처신으로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그가 1970년대 중반 서울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 사무국장으로 있을 때였다. 병원에 들어오는 약품, 의료 설비, 식자재 등을 총괄하는 자리였다. 당시 사무국장이 도매상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약품 리베이트는 15%였다. 이걸 도매상으로부터 받지 않고 제약회사와 직거래를 하니까 가격이 40% 저렴했다. 15%면 요즘 돈으로 몇억 원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그 정도 리베이트는 관행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유목기는 월급쟁이는 월급 외에 돈 받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감사실에 특명을 내려 큰딸 이인희가 운영하는 고려병원을 정밀 감사하게 되었다. 당시 이 회장은 에버랜드에 젊은 소실을 하나 두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이가 큰딸 이인희보다 한 살 아래였다고 한다. 그녀를 이인희가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데면데면하게 대했던 것이 이병철의 심기를 건드린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은 아니지만 그 시절까지 일부 재벌 오너는 일부다처제의 관습이 있었다. 이 회장은 딸이 운영하는 고려병원이 6개월 동안이나 감사를 받게 했다. 결국 돈 만지는 실무자였던 유목기가 감사를 받는 셈이었다.

6개월의 강도 높은 감사를 받고도 유목기는 책 잡히지 않았다. 이 일화는 10여 년 전 도산의 퇴계 종가에서 유목기와 동창인 종손으로부터 처음 들었다. 유목기의 팔자를 보니 금기(金氣)가 강한 칼잡이 사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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