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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이철원

중국이 제조업 강국으로 급부상하며 한국의 주력 산업을 위협하고 있다. 이제 중국은 단순 생산을 넘어 기술 혁신까지 주도하는 수준이 됐다. 최근 중국의 배터리 안전 기준을 강화한 것이 단적인 사례다. 지난 17일 중국 정부는 내년 7월부터 적용될 전기차 배터리에 대한 안전 요구 사항을 발표했다. 내용은 놀라웠다. 기존 규정은 화재 또는 폭발 5분 전에 경고 신호를 표시하도록 하는 수준이었지만, 개정 규정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배터리가 발화하거나 폭발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했다. 현재 기술로 가능할까 싶었다.

하지만 불과 나흘 뒤 세계 최대 배터리 제조업체인 중국의 CATL은 기다렸다는 듯 이런 기준을 모두 충족시키는 나트륨 배터리를 발표했다. 발표장에서 CATL은 압축, 관통, 절단 등 모든 극한 조건에서 화재나 폭발이 없다는 걸 보여줬다. 양산 시기도 올해 12월로 못 박았다. 이제 중국은 고성능 리튬이온, 저가격 인산철(LFP) 배터리에 이어 안전성의 나트륨 배터리까지 상용화하면서 압도적인 배터리 기술력을 갖춘 국가가 되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점점 초라해지고 있다. 2024년 배터리 시장에서 우리나라의 점유율은 14%로 전년보다 10%포인트 감소했다. 반면 중국의 점유율은 74%로 전년보다 11%포인트 증가했다. 뒤늦게 LFP 배터리 생산에 나선 국내 업체들은 중국 업체가 공급하는 양극재에 의존하는 실정이다.

중국의 약진은 반도체 영역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나고 있다. 최근 중국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주력 D램 제품인 DDR5 제품을 본격 공급하기 시작했다. 성능 측면에서도 국내 업체에 비해 손색이 없다. 2020년 0%에 가까웠던 중국의 메모리 반도체 점유율은 올 연말에는 10%를 넘길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제 대한민국은 할 수 있고 중국은 못하는 것은 없다.

그래픽=이철원

중국의 급속한 첨단 제조업 성장에 맞서기 위해 우리도 연구개발 투자를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개발 투자 국가다. 2023년 우리나라의 GDP 대비 연구개발비 비율은 4.96%로 이스라엘(6.02%)에 이어 세계 2위다. 연간 연구개발비는 1487억달러 규모로 미국(9232억달러), 중국(8118억달러)에 비해 부족하지만 일본·독일과는 비슷하고 영국·프랑스보다는 많다. 일각의 지적과 달리 기초연구 투자도 부실하지 않다. 우리나라는 연구개발비에서 기초연구가 차지하는 비율이 14.9%로서 중국(6%)은 물론 미국(14.3%), 일본(12%)보다도 높다. 인력도 적지는 않다. 전체 연구 인력 규모는 세계 4위권이며 취업자 1000명당 연구자 수(17.3명)는 세계 1위다. 최선을 다해 많은 돈을 쏟아붓고 있지만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더 많은 지원이 필요하다기보다는 어디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찾아야 한다.

왜 중국은 전진하고 우리는 후퇴할까. 연구 인력의 역량 차이와 장기적 비전이 있는지 여부가 가장 크게 두드러진다. 중국은 풍부한 인력 풀에서 경쟁을 통해 능력을 입증한 전문가들이 세부 분야마다 포진해 있다. 중앙 정부 관료들 역시 충분한 자질을 갖추고 일관성 있게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우리는 5년마다 정책 방향이 선회를 반복하고 있다. 대학과 연구기관들은 공장처럼 논문을 찍어내면서 실적 채우기에 급급하다. 논문보다 보도자료 쓰는 데 익숙한 전문가들은 현실을 외면한 장밋빛 전망을 내놓으며 상황을 호도하고 있지만, 관료들은 이를 판단할 능력이 부족하다. 기획 없이 발주되는 온갖 연구 용역들은 잘못된 선정 기준으로 인해 연구비 따먹는 데 특화된 업체들의 몫이 되고 있다. 전체 연구개발비의 80%를 담당하는 기업들 역시 현실 안주 경향이 강해지면서 중국의 도전에 무기력하게 시장을 내주고 있다.

그래픽=이철원

산업정책 측면에서도 중국에 뒤처지고 있다. 무조건 돈을 퍼붓는다는 인식과 달리 중국의 산업정책은 경쟁과 지원을 효과적으로 결합한다. 보조금을 겨냥한 업체들이 다수 등장해 낮은 수준에서 치열한 경쟁을 펼칠 때는 정부가 방관한다. 대신 시장 창출을 위한 다양한 수요 촉진 정책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시장을 키우고 해외 업체와의 경쟁에 대한 적절한 보호책을 한시적으로 제공한다. 살아남은 업체들이 시장을 주도하는 단계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인 지원을 통해 기술력 향상을 이끌어낸다. 대신 전후방 연관 산업을 키우고 원료 수급을 원활하게 만들면서 전체적인 생태계를 지속적으로 키운다. 중국 중심의 완결된 산업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는 얘기다. 우리가 잘해 왔던 방식을 이제 중국이 더 잘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국가 주도 산업정책의 시대는 지나갔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미국식 자유경쟁도 거부하면서 시간을 흘려보냈다. 중국이 반칙을 한다고 비판하지만 반칙에 맞서 싸우지도 못했다. 중국의 경쟁력을 무시했기에 협력도 못 해보면서 경쟁에서 밀리고 있다. 바이든과 트럼프 대통령을 거치면서 국가 주도 산업정책은 필수적인 것이 되고 있다. 2030년이 되면 세계 제조업 생산 능력의 45%는 중국이 보유한다. 한국, 미국, 독일, 대만을 합해도 22%밖에 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제조업 비율이 25.6%에 달하는 우리는 중국과의 경쟁에서 밀리면 생존이 위태로워진다. 당연히 위기감을 가지고 기존의 틀과 질서를 깨고 바꿔야 하지만 2025년 대한민국은 변화를 원치 않아 보인다. 제조업 강국으로서 한국의 미래는 중국과의 경쟁에서 어떻게 차별화된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단순히 연구개발비 증액이 아닌 R&D 시스템의 근본적 개혁, 산업정책의 일관성 확보, 그리고 무엇보다 인재 육성의 패러다임 전환이 시급하다. 중국의 성공 사례는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변화의 방향을 암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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