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염이 흰 노인이 처형당한다. 형리들은 그의 손발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으로도 모자라, 십자가를 거꾸로 매달고 있다. 이토록 끔찍한 형벌은 사실 노인 스스로 청한 일이다. 자신은 감히 구세주 예수와 같은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할 자격이 없으니, 거꾸로 매달아 달라고 간청했다. 그는 바로 예수의 12사도 중 첫 번째이며, 초대 로마 교황으로 추앙받는 성 베드로다. 오늘날 교황령의 중심인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은 그의 무덤 위에 세운 것이다.
이 장면은 15세기 피렌체에서 비단 무역으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쌓은 브랑카치 가문이 세운 예배당 내부 벽화 중 하나다. 주문자였던 펠리체 브랑카치는 가업을 일으켜 그에게 물려준 삼촌, 피에트로 브랑카치를 기리기 위해 삼촌의 수호성인이었던 성 베드로의 일생을 예배당에 그리고자 했다. 물론 로마 교황청에 대한 그의 충성심을 공공연히 드러내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벽화 대부분은 피렌체 최고 화가로 떠오르던 마사초가 맡았지만, 마사초는 작업 도중 로마로 떠났다가 요절했다. 이후 수십 년간 미완으로 남았던 벽화는, 필리피노 리피(Filippino Lippi·1457년쯤~1504년)가 이어 그렸다.
리피는 수도사이자 화가였던 프라 필리포 리피와 수녀 사이에서 태어났다. 합법화될 수 없는 출생이었으나, 그는 교황의 특별 승인 덕분에 별다른 불이익 없이 성장해 훌륭한 화가가 되었다. 마지막 순간에도 담담하고 강렬한 성 베드로의 모습에는 세상의 편견을 넘어서서, 죄 없는 이들을 감싸안았던 교황의 자비에 대한 조용한 감사가 은은히 깃들어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