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첩단 사건 재판 지연은 이제 뉴스가 아니다. 충북동지회 사건과 민노총 간첩단 사건은 1심만 각각 2년 5개월, 1년 6개월이 걸렸다. 둘 다 1심에서 중형이 선고되긴 했지만 심각한 재판 지연이다. 피고인들이 국민참여재판 신청, 법관 기피 신청, 위헌심판 신청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재판을 지연한 탓이다. 거의 예외 없이 이런 일이 벌어져 이젠 다들 으레 그러려니 한다.
그런데 창원 간첩단 사건은 그 정도를 넘어서고 있다. 기소된 지 1년 11개월이 지났는데 재판 두 번 하고 중단된 상태다. 피고인들은 구속 기간(6개월)이 지나 이미 다 풀려났다. 재판이라고 할 수 없다. 그 과정은 더 어처구니없다. 피고인들은 애초 서울이 아닌 창원에서 재판받겠다며 관할 이전을 신청했다가 기각당하자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했다. 불허되자 항고·재항고를 계속했다. 대법원에서 최종 기각돼 5개월 뒤 재판이 열렸는데 법 절차를 지키지 않았다며 재판장을 고발하고 법관 기피 신청을 내 재판이 또 중단됐다.
그 신청도 대법원에서 기각돼 재판이 재개됐지만 얼마 가지 못했다. 서울중앙지법 재판부가 작년 4월 사건을 창원지법으로 넘기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앞서 서울고법이 피고인들이 냈던 이전 신청은 기각했는데, 서울중앙지법 재판부가 직권으로 이송을 결정한 것이다. 골치 아픈 재판을 떠넘긴 것 아니냐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서울중앙지법은 “사건 기록이 방대해 집중 심리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사건을 창원으로 넘겼다. 한 재판부가 특정 사건을 집중 심리하려면 다른 사건을 분담해줄 재판부가 많아야 한다. 하지만 재판부가 많은 서울중앙지법과 달리 창원지법은 형사합의 재판부가 2개뿐이다. 집중 심리가 사실상 불가능한 법원에 집중 심리하라고 넘긴 것이다. 그러니 사건을 넘겨받은 창원지법 재판장도 공판준비기일에 “집중 심리가 어렵다”고 했다고 한다. 코미디 같은 일이다.
피고인들과 변호인이 이런 상황을 놓칠 리 없다. 창원지법이 공판준비기일을 진행하던 작년 10월 “국정원 수집 자료가 불법”이라는 자신들의 주장을 재판부가 안 받아들였다며 또 법관 기피 신청을 냈다. 현행법엔 재판 지연 의도가 명백한 법관 기피 신청은 바로 기각하고 재판을 진행할 수 있게 돼 있다. 하지만 재판부가 그 판단을 다른 재판부로 넘기면서 재판은 또 중단됐다. 결국 사건 이송 후 10개월간 창원지법에서 정식 재판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제주 간첩단 사건 재판도 기소된 지 1년 10개월이 지났지만 파행 상태다. 피고인들은 첫 공판 준비 기일에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했는데 이 신청이 대법원에서 최종 기각되기까지 무려 7개월이 걸렸다. 피고인들은 재판 한 번 안 받고 다 석방됐다. 작년 1월 열린 첫 재판에선 25분 만에 무단 퇴정했다. 이어 법관 기피 신청을 냈는데 지난달 대법원에서 최종 기각되기까지 또 6개월이 걸렸다. 이런 신청에 대한 판단은 오래 걸릴 게 없다. 그런데 판사들이 시간을 끌면서 재판이 지연되는 것이다. 피고인들의 재판 농락을 판사들이 돕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간첩 사건 피고인들의 방어권도 보장해야 한다. 하지만 창원·제주 간첩단 사건은 이미 그 선을 넘었다. 두 사건 변론은 공안 사건 단골 변호사인 장경욱 변호사가 주도하고 있다. 민변 출신인 그는 2011년 북한 지령을 받아 활동한 간첩단인 ‘왕재산’ 사건 변호를 맡았다가 핵심 증인에게 묵비권 행사를 종용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을 빚었던 인물이다. 그 변호사와 피고인들이 법 절차를 악용해 재판 시스템을 농락하고 있는데 판사들은 무력하게 끌려다니고 있다. 무책임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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