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판이 곧 정치”라고 한 판사가 있었다. 그는 “개개의 판사마다 정치적 성향이 있다는 진실을 받아들이고 존중해야 한다”고 했다. 또 “훌륭한 법관이라도 정치 혐오, 무관심 속에 안주한다면 진정 훌륭하다고 하기는 어렵다”고도 했다. 그는 2017년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이 터지자 진상 조사를 요구하며 10일간 단식했다. 알고 보니 국제인권법연구회 소속이었다.
전국 법관 수는 3100여 명이다. 이 중 400여 명이 ‘인권법’ 소속이다. 법원 내 대규모 학술 단체 중 하나다. 국민 세금으로 예산 지원도 받는다. 인권법은 2011년 장애인·난민 등 국내외 사회적 약자의 인권 보호 방안을 연구한다는 목적으로 설립됐다. 연구 단체라지만 법원 내 ‘정치 결사체’로 생각하는 국민이 적지 않다. 창립 멤버 31명 중 10명이 우리법연구회 출신이다. ‘우리법’ 회장을 지낸 김명수 전 대법원장이 인권법 초대 회장을 맡았다. 인권법이 우리법의 후신(後身)이란 말이 나오는 이유다.
한동안 잊혔던 우리법·인권법이 윤석열 대통령 수사와 탄핵심판 과정에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윤 대통령을 체포한 공수처 오동운 처장은 인권법 출신이다. 공수처에 체포 영장을 발부한 서울서부지법 이순형 부장판사는 우리법 출신이다. 탄핵심판을 맡은 헌재는 문형배 권한대행이 우리법 회장이었고, 이미선 재판관은 인권법 출신이다. 정계선 재판관은 우리법과 인권법 모두에서 활동했다. 국회 탄핵소추단의 박범계·최기상 의원도 우리법이다. 탄핵심판의 공격수와 심판이 같은 모임 출신이다. 공정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헌재는 “탄핵심판은 헌법과 법률을 객관적으로 적용해 이뤄지는 것이지 재판관 개인 성향에 좌우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실제 재판 결과는 다르다.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탄핵,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권한쟁의 등에서 재판관들은 평소 언론이 분류한 성향 그대로 판결했다. 특히 우리법·인권법 출신은 기각이든 인용이든 같은 의견을 낸 경우가 72%에 달하고,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에선 이 비율이 90%까지 오른다는 분석도 있다. 최근에는 ‘울산 선거 개입’ 사건 2심 판결이 논란이 됐다. 1심은 송철호 전 울산시장과 황운하 의원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지만, 인권법 출신이 주심을 맡은 2심은 “유죄 의심이 들지만 직접 증거가 없다”며 모두 무죄로 뒤집었다. 사람들은 요즘 예상과 다른 판결이 나오면 “혹시 그 판사 인권법이냐”부터 묻는다. ‘재판이 곧 정치’라면 ‘판사가 곧 정치인’이 된다. 삼권 분립이 허물어지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국민의 권리가 그만큼 침해당한다.
그러나 인권법 소속이라고 다 야당에 유리한 판결만 내리는 것은 아니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 선거법 사건 1심에서 징역형을 선고한 한성진 부장판사도 인권법 출신이다. 추미애 법무 장관의 징계 결정을 뒤집고 윤석열 검찰총장에게 업무 복귀의 길을 열어준 판사도 인권법 출신 조미연 판사다. 인권법 판사들은 “회원이 400명이 넘기 때문에 스펙트럼이 넓다”고 한다. 우리법·인권법이란 이유만으로 판사들을 낙인찍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인권법 판사 상당수는 공정한 판결을 위해 노력한다고 믿는다. 다만 일부 회원의 ‘정치 판결’이 도드라지면서 인권법 전체가 ‘사법 불신’의 아이콘이 됐다. 일반 회원들은 사실과 다른 오해에 속상하고 억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자진 해산을 선언하면 어떤가. 인권법이 목표로 했던 난민·장애인 등에 대한 인식과 처우도 점차 개선되고 있다. 노무현 정부 때 비슷한 논란을 겪은 우리법도 스스로 해산했다. 인권법 판사들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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