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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월 9일 플로리다주 웨스트팜비치의 팜비치 국제공항에서 에어포스원을 타고 이동하면서 멕시코만을 미국만으로 개명하는 포고문에 서명하기 전 언론과 대화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월 9일 플로리다주 웨스트팜비치의 팜비치 국제공항에서 에어포스원을 타고 이동하면서 멕시코만을 미국만으로 개명하는 포고문에 서명하기 전 언론과 대화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2022년 2월 21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에 친러 반군 세력이 수립한 도네츠크·루한스크 인민공화국의 독립을 승인한다고 발표했다. 우크라이나에서 떼어내 러시아 연방으로 편입시키는 절차의 시작이었다. 사흘 후 푸틴은 러시아계 인구를 보호해야 한다는 핑계로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했다.

그런데 이 뉴스를 TV로 보던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침공에 분개하는 대신, 푸틴이 “천재”라며 감탄했다. 트럼프 본인이 라디오에서 밝힌 일화다. 트럼프는 “푸틴이 ‘독립’이란 말을 쓰면서 ‘우리가 거기 가서 평화를 유지하겠다’고 하더라. 상당히 요령이 좋다(savvy)”고 말했다. 타국 영토에 괴뢰국을 세운 뒤, 그 독립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들여보내는 수법을 칭찬한 것이다.

지금 보면 이때 트럼프는 정말로 푸틴의 수법에 감탄했던 것 같다. ‘저럴 수도 있구나!’란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집권 1기 트럼프는 동맹과 국제기구를 불신하고, 타국 일에 개입하지 않으려는 ‘고립주의자’로 보였다. 재선에 성공한 트럼프는 좀 달라졌다. 이웃 캐나다가 “미국의 51번째 주가 돼야 한다”고 한다. 파나마 운하와 그린란드 확보를 위한 군사력 동원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이 지역들의 통제권 확보를 위해 군사적·경제적 강압은 안 할 것이라고 확언할 수 있나”란 질문에 “확언할 수 없다”고 했다. 가자지구 주민들을 이웃 국가로 이주시킨 뒤 미국이 “소유권”을 갖겠다고도 한다.

트럼프가 이런 생각을 한대서 금방 달라지는 것은 없다. 캐나다나 파나마, 그린란드가 갑자기 주권을 포기할 리 없는 것이다. 가자지구 주민 210만명의 이주도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트럼프의 구상이 신경 쓰이는 것은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주권과 영토의 현상(現狀)도 적극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어서다. 그런 목적의 군사력 동원과 경제적 압박도 금기시하지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주도해 온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에 배치될 뿐더러, 트럼프 퇴임 후에도 세계 질서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일이다. 미국이 이러면서 중국에 ‘대만의 현상 변경을 시도하지 말라’고 할 수 있나.

오늘의 대한민국은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 덕분에 번영한 나라다. 자유 민주주의와 인권, 법의 지배, 자유 무역, 규범과 협상을 통한 문제 해결 같은 원칙이 국제사회에서 통용되는 시대를 만났기에 전례 없는 발전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한다고 느낀 지 벌써 10년쯤 됐다.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합병했을 때, 오바마 행정부는 경제 제재만 하고 군사력 동원은 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가 나토 회원국이 아니란 이유로 사실상 현상 변경을 묵인했다. 미국이 중국의 부상에 대응하느라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할 힘이 없어졌다는 말도 나왔다. 당시 러시아의 크림 합병에 반대하는 유엔 안보리 결의안은 상임이사국인 러시아의 거부와 중국의 기권으로 채택되지 못했다. 이때 안보리 형해화가 시작돼 지금은 북한이 무슨 짓을 하든 손쓰지 못한다.

2016년 영국이 유럽연합(EU) 탈퇴를 결정하고, 미 대선에서 트럼프가 당선되자 ‘고립주의의 부활’이라고들 했다. 그런데 이제 트럼프는 고립주의도 아닌, 팽창주의자로 보인다. 역사를 돌아보면 국제 질서의 변화로 이어진 사건들도 처음엔 그 의미를 분명히 몰랐던 경우가 많다. 만약 트럼프적 발상이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미국의 근본적인 변화를 미리 알리는 신호탄이라면 어쩌나. 가뜩이나 중·러의 도전과 인공지능(AI) 등의 첨단 기술 경쟁 속에 어지러운 국제 질서는 어떻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