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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탄핵 위기에 몰린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이 사임 의사를 처음 밝힌 것은 1974년 8월 2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캘리포니아주 연방 의원들조차 탄핵 찬성 입장을 밝히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가족들에게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부인 팻 여사를 비롯한 가족들은 “끝까지 싸워야 한다”며 강하게 만류했다.

가족들의 반대에 망설이고 있을 때인 8월 5일 닉슨의 오벌 오피스 대화 녹음테이프가 공개됐다. 이는 닉슨이 1972년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조사 방해 계획을 승인한 결정적 증거였다.

8월 7일, 1964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배리 골드워터를 비롯한 여당 지도부가 백악관을 찾았다. 이들은 닉슨이 계속 버틸 경우,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탄핵당한 대통령이 될 수 있음을 알렸다. 연방 의회 기류를 알아차린 닉슨이 가족들을 모이게 한 후 선언하듯이 말했다. “우리 이제 (고향인) 캘리포니아로 돌아갑시다.”

8월 8일 저녁 백악관에서 미국 국민에게 사임 방송을 하기 위해 분장하는 중에도 닉슨은 계속 흐느꼈다. 베트남전 종전 계기를 만들고, 중국을 전격 방문해 미·중 관계 정상화 물꼬를 트고, 소련과 데탕트 정책을 추진한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저녁 9시 정각,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보던 TV 카메라에 빨간불이 들어오자 사임 관련 심경을 솔직히 밝혔다. “워터게이트 사태라는 길고 어려운 시기에도 저는 대통령 임기를 완수하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며칠 사이, 더 이상 의회에서 강력한 정치적 기반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습니다.”

닉슨은 대통령직 사임이 개인적으로 고통스럽지만, 국가 이익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고 두 차례 강조했다. “저는 개인적으로 어떤 고통이 따르더라도 끝까지 임기를 수행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제 가족도 만장일치로 그렇게 하라고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국가 이익이 언제나 개인적인 고려보다 앞서야 합니다.” “저는 결코 (어떤 일을)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물러나는 것은 본능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으로서 저는 무엇보다도 미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했습니다.”

닉슨은 사임 연설에서 본능을 언급할 정도로 자존심이 강한 정치인이었다. 1960년 대선에서 존 F 케네디에게 패배한 후 절치부심, 8년 만에 기어이 백악관에 입성할 정도로 뚝심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뒤늦게 워터게이트로 미국 민주주의가 무너질 수 있음을 감지했다. 자신의 문제로 국내외 현안에 직면한 미국 사회가 더 이상 사회적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개인적인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앞으로 몇 달을 계속 싸운다면, 이는 대통령과 의회의 시간, 노력을 거의 완전히 빼앗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간은 우리가 해외에서의 평화와 국내에서의 물가 상승 없는 번영이라는 중대한 과제에 집중해야 할 시간이어야 합니다.” 닉슨은 “나를 반대한 분들에게 어떠한 원한도 갖고 있지 않다”며 자신의 사임을 계기로 “국가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5분간의 닉슨 사임 발표 다음 날인 8월 9일 그를 태운 에어포스원이 미주리주 상공을 지날 때 제럴드 포드 부통령이 대통령 취임 선서를 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닉슨 사면이 발표됐다.

닉슨은 잘못을 저지르고 이를 부인함으로써 미국 국민을 실망시켰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미래를 내다보는 결단을 내림으로써 위기에 처한 자신과 국가를 구한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게 됐다. 헌재 결정으로 자칫 나라가 두 동강이 날 수 있는 위기 상황에서 51년 전 닉슨 사례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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