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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어. 내일 2개 치면 되지. 괜찮아.” 지난해 프로야구 정상에 오른 KIA 이범호(44) 감독. 그는 경기에서 안타를 하나도 못 친 타자가 풀이 죽어 들어오면 이렇게 말을 건넸다. 거의 매일 경기가 있는 프로야구. 그날그날 피땀이 쌓여 한 해 성적이 나오지만 조바심을 내면 그르친다. 하루에 집착하면 한 해를 볼 수 없다.

“선수를 믿고 가는 거죠.” 병살타를 치고 쥐구멍에 숨는 표정으로 구석에 처박혀 있던 선수를 보면 부른다. “야, 다음 타석에서 잘 치면 되지 왜 그러고 있어.” “그런 거 아닙니다. 제 스타일입니다.” “스타일은 무슨. 이리 와. 다음에 네가 쳐서 이기게 만들면 되잖아.”

2024년 10월 28일 광주 기아 챔피언스필드에서 열린 삼성과 KIA의 한국시리즈 5차전. 9회초 7대5로 승리하며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이범호 감독이 삐끼삐끼 춤을 추고 있다. /스포츠조선 정재근 기자

그는 “선수들에게 상처를 주지 말자”는 신조를 갖고 있다. 프로페셔널이라면 결국 알아서 한다. 안 그러면 어차피 도태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런 선수들에게 실수할 때마다 강하게 질책해 봤자 역효과가 날 뿐이다. (선수를) 해봐서 안다. 이범호가 훌륭한 건 안다고 다 실천하진 않는데 그걸 실천했다는 데 있다.

그는 취임사에서 “웃음꽃 피는 야구를 하겠다”고 말했다. ‘뭔 한가한 소리여’ 야유도 나왔지만 이젠 그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선수들이 항상 웃으면서 그라운드에서 즐겁게 플레이할 수 있는 분위기. ‘이건 안 돼, 저건 안 돼’보다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봐’라고 하는 긍정의 에너지. 이런 기운이 다져지면 강팀이 탄생한다.

지난해 팀 내 최고참 투수 양현종(37)과 벌인 ‘백허그’ 사건은 이범호 리더십의 또 다른 단면을 보여준다. 그날 양현종은 잘 던지고 있었다. 그런데 중간에 흔들렸다. 5회만 넘기면 승리 투수가 되는데 어느덧 점수는 9-5에 5회 투아웃 1-2루. 이범호는 양현종을 내렸다. ‘1아웃만 더 잡으면 되는데. 4점이나 앞서고 있는데…’ 양현종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내려왔다. 이범호는 덕아웃에 들어온 양현종을 장난스레 뒤에서 안으며 위로했다. 아무리 고참이라지만 감독이 선수에게 저렇게까지. 다들 놀랐다.

시즌이 끝나고 이범호는 후일담을 전했다. “현종이가 나중에 미안하다고 그러더라고요. 자기가 평소 후배들에게 ‘개인 승리보다 팀 승리가 우선’이라고 설교하면서 자기는 정작 그런 모습을 안 보여서 부끄러웠다고.” 그다음 경기에서 양현종은 9회까지 책임지면서 완투승을 거뒀다.

KIA 타이거즈 이범호 감독이 17일 삼성 라이온즈전에서 5회 강판한 양현종을 뒤에서 끌어안고 있다. (티빙 캡처)

프로야구 판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는 돈이다. 그러나 돈으로 모든 걸 살 수 없다. 그다음은 감독이다. 누구 밑에서 뛰느냐가 선수들이 팀을 결정하는 데 영향을 준다는 설명이다. KIA 선수들 사이에선 “감독님을 위해서 우승하고 싶다”는 말이 돌았다고 한다. KIA가 괜히 우승한 게 아니다. 직원들이 사장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실적을 올리고 싶다는 회사가 과연 얼마나 될까.

최초 1980년대생 감독 이범호는 취임 첫해 일을 냈다. 물론 결과가 좋으면 과정은 미화되기 마련이다. 이범호 역시 우승을 한 덕분에 그동안 보여준 포용적 리더십이 찬사를 받은 측면도 있다. ‘이범호식’으로 한다고 누구나 우승할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우연일 수 있고 운이 좋았을 수 있다. KIA 성적이 형편없었다면 “거봐 저렇게 애들을 풀어주니 안 되는 거야” 질타를 받았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런 시도가 성공했다는 건 울림이 있다. 조직을 관리하는 다양한 방법 중 그가 선택한 길, 상대(선수들) 마음을 읽고 헤아리면서 잠재력을 최대한 이끌어내는 부드러운 지도 방식이 궁극의 목표를 이뤘다는 사실. 이런 사례가 많아질수록 성공이 주는 여운은 좀 더 오래갈 것이다. 결과만 행복한 성공이 아닌, 과정까지 행복한 성공. 그런 게 진정한 성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