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외국의 주요 대사관이 몰려 있는 정동(貞洞)에 이런저런 일로 자주 가는 편이다. 조선일보사에서 영국 대사관 정문 옆 덕수궁 내부로 난 길을 따라가면, 미국 대사관저가 나오고 그 맞은편에 러시아 대사관이 보인다.
2022년 2월 푸틴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침공 명령 이후 러시아 대사관 주변을 유심히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푸틴과 러시아 정부에 항의하는 시위나 플래카드, 피켓이 있는지를 유심히 관찰해 왔다.
실망스럽게도 러시아 대사관 주변은 놀랄 만큼 평온하다. 정동제일교회와 배재공원의 고즈넉한 분위기에 묻혀 있다.
오히려 한 달 전엔 이곳에서 대형 러시아 국기가 수십 개 펄럭이는 가운데 러시아 지지 행사가 열렸다. 게오르기 지노비예프 주한 러시아 대사는 우크라이나 침공 3주년인 지난달 24일, 대사관에서 나와 이례적인 집회를 개최했다. 대사 및 직원과 러시아인 수십 명이 참석한 전쟁 지지 집회가 서울 한복판에서 열린 것은 러·우 전쟁 이후 처음이었다.
지노비예프 대사는 왼손에 러시아 국기를 들고 연단에 올라가 연설했다. “러시아는 오래전부터 안보 위협에 직면해 왔다”며 우크라이나 침공의 책임이 서방에 있다고 규탄했다. 그는 푸틴처럼 러·우 전쟁을 ‘특별 군사작전’이라고 부르며 “3년 전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날은 단극 시대가 끝나고, 공정한 민주적인 다극 국제 질서로의 전환을 상징하는 날”이라고 했다. 참석자들은 러시아 국기를 들고 대사관까지 행진하기도 했다.
얼마나 한국을 우습게 알면, 서울 한복판에서 러시아 국기를 흔들며 이런 집회를 열었을까.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 1·2주년에는 이런 행사를 개최하지 않고 한국 눈치를 봤는데 이제는 완전히 달라졌다.
러·우 전쟁은 북한군 1만3000명이 파병되면서 더 이상 우리와 관계없는 일이 아니게 됐다. 러시아 파병 후 귀국하는 북한 장교들은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대남 침략용 야전교범을 가다듬을 것이다. 우크라이나군에 맞섰던 병사들은 휴전선 곳곳에 배치돼 유사시에 대비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열린 러시아 대사관의 전쟁 지지 집회는 우리 정부의 유화정책이 자초한 측면이 있다. 한국 외교는 러시아가 북한과 전쟁을 함께 하는 동맹 조약 체결에 이어 북한군이 파병되는 상황을 겪으면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러시아가 10여 년 전부터 한국과 전쟁을 벌이는 상황을 가정해 포항제철, 부산의 화학 공장 등 민간 시설을 표적으로 삼는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했다고 보도했다. 러시아가 한국의 민간 시설에 대해 공격 계획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처음인데, 외교부는 러시아 대사를 초치하지도 않았다. 일종의 비공식적 선전포고라고 할 수 있지만, 항의하지 않고,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갔다.
이달 들어 러시아 폭격기·전투기는 지난 11일부터 8차례에 걸쳐 우리 방공식별구역(KADIZ)에 무단 진입하고 있다. 과거엔 KADIZ와 일본방공식별구역(JADIZ)을 함께 휘젓고 다녔는데, 이번엔 한국만 골라서 농락하고 있다. 러시아는 2019년 독도 주변의 우리 영공을 침범했는데, 유사한 사태를 재현하기 위한 예행 연습일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그럼에도 한국 외교부는 러시아가 “한국은 비우호국 중 가장 우호적인 국가”라고 반복해서 말하는 데 기대를 걸고 있다. 러·우 전쟁이 끝나면 북한은 쓸모가 없어져 그럭저럭 잘 지냈던 옛날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애인에게 구타당하면서도 “너를 사랑하니까 이러는 거야”라는 말에 가스라이팅 당하는 모습인데, 이게 헛된 희망이라는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지금은 무엇보다 ‘러시아 공포증’ ‘러시아 특별국가론’에서 벗어나 담대하게 대하는 결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너무 늦지 않게 깨닫기를 바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