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e
00:00
2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미국 에너지부가 한국을 민감국가로 지정한 문제와 관련 현안질의 등을 위해 열린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조태열 외교부 장관이 의원 질의에 답하고 있다./남강호 기자
2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미국 에너지부가 한국을 민감국가로 지정한 문제와 관련 현안질의 등을 위해 열린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조태열 외교부 장관이 의원 질의에 답하고 있다./남강호 기자

“미국 대통령이 임기가 한 달 남은 시점에 다른 나라를 위해 핵 위험을 무릅쓰는 결정을 내릴 수 있겠는가? 대통령 선거 후 취임하기까지 3개월 사이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어떻겠는가?”

걸핏하면 핵 공격 협박을 퍼붓는 북한을 염두에 둔 질문 같지만 아니다. 아데나워 서독 총리가 1957년 10월 키신저를 처음 만났을 때 물었던 내용이다. 그는 미국 대통령이 서독을 위해 핵 위험을 감수할 결단을 내릴 수 있을지 끝까지 의심했다.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위해서 그 정도의 파괴 위험을 무릅쓴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대화를 떠올린 건 최근 미국이 한국을 ‘민감 국가’로 지정한 사실이 알려지고, 민주당과 일부 전문가가 보인 경기(驚氣)에 가까운 호들갑 때문이다.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 윤석열 대통령과 여당이 독자 핵무장 또는 핵 잠재력 확보를 공개적으로 언급한 탓이라고 몰아붙였다. 그러면서 핵무장 논의 자체를 죄악시하고 있다.

지금의 한국 상황은 아데나워가 미국을 의심했던 시절보다 훨씬 심각하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재집권한 지금 세상은 동맹에도 언제든지 ‘배신과 모욕’을 안겨줄 수 있는 새로운 국제 질서로 재편되고 있음을, 우리는 지난달 28일 백악관에서 열린 트럼프와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정상회담에서 목도했다. 그보다 4일 전에는 미국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을 명시한 결의안에 러시아·북한과 함께 반대표를 던지며 유럽의 뒤통수를 쳤다. “언젠가 미국은 (유럽을) 떠날 것”이라고 예견한 드골이 옳았다.

이것이 현실 정치의 본질일 것이다. 동맹은 불변의 유대가 아니라 이해관계와 시대적 필요에 따라 변형된다. 이미 유럽연합은 대규모 재무장 계획을 발표하며 대응에 나섰다. 독일은 정부 부채 한도 규정에서 국방비를 예외로 하는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고, 폴란드 총리는 의회 연설에서 독자적인 핵무장 검토와 함께 병력을 20만에서 50만으로 늘리자고 주장했다.

‘최강 동맹’이라는 대서양 동맹이 이럴진대 미국과 아시아 국가 간의 양자 동맹이라고 무사할까. 트럼프가 푸틴과 거래할 때 유럽에 보인 태도를 김정은이나 시진핑과 거래할 때 반복하지 않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을까. 트럼프 1기 때의 참모들은 당시 트럼프가 주한 미군 철수 문제를 여러 번 거론했다고 회고록에서 증언했다. 트럼프 2기에서 동맹과 국방 전략을 담당할 엘브리지 콜비 국방부 정책차관 지명자는 인준 청문회에서 한미 동맹은 현재의 지정학적 상황에 맞춰 업데이트해야 한다고 했다.

미국이 동맹 정책에 변화를 주는 것이 분명한 만큼 우리도 전략적 위치를 재정립해야 하는 게 마땅하다. 그것은 독자적인 안보 역량을 강화하는 방향일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도 핵무장론과 핵 잠재력 논의조차 죄악시하는 주장을 어떻게 봐야 할까. 어떤 변화든 얻는 것이 있다면 잃는 것도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들은 잃는 것만 과장하면서 공포 마케팅을 펼친다. 한국의 객관적 국력과 위상을 과소평가하면서 전략적 입지를 스스로 좁힌다. 약소국, 정신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미성년 국가로 인식하도록 국민을 가스라이팅하고 있다. 핵 위협을 가해도, 적대 정책을 펴도 북한을 끌어안아야 하고 러시아와 우호 관계를 유지해야 하며 중국에 척지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신경을 조금이라도 거스르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이런 행태가 국민과 국가의 자강(自强) 의지를 거세하는 짓이다.

국가의 장기적 생존은 외부 세력의 보호가 아니라 스스로의 힘과 외교적 기민함을 통해 확보할 수밖에 없다는 건 불변의 진리다. 자주국방의 의지조차 없는 타락한 리더십과 엘리트 집단이 안보의 진짜 위험 요소다.

매일 조선일보에 실린 칼럼 5개가 담긴 뉴스레터를 받아보세요. 세상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5분 칼럼' 구독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