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나리’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윤여정이 연일 화제다. 쿨한 화법부터 당당한 영어, 패션 감각까지 윤여정 입체 탐구가 쏟아진다. 넘치는 찬사에 하나 보태 본다. 전직 건축·디자인 담당 기자로서, 집으로 엿본(비록 방송으로 봤지만) 윤여정의 심미안이 혼자 감탄하기엔 아까워서다.
‘할머니’ ‘엄마’보다 ‘언니’란 호칭이 어울리는 이 일흔넷의 배우가 사는 평창동 집을 몇 해 전 예능 프로그램에서 본 적이 있다. 건축 취재를 하면서 얻은 깨달음이 있다면, 한 사람의 진면목은 먹고 자고 쉬는 집이라는 공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드러난다는 것이다. 정리하고 어지럽힌 흔적마저도 집주인이 만든 일상의 잔상이니까.
윤여정 집은 ’70대 할머니 집’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집는다. 커다란 TV, 두 다리 쭉 뻗을 수 있는 가죽 소파, 안마 의자…. 실버 세대가 선호하는 가구와 가전이 안 보인다. 특히 56년째 영화와 드라마를 밥벌이로 삼아온 배우의 거실에 TV가 없다는 게 인상적이다. 후배 가수가 이유를 묻자, 윤여정이 답한다. “얘, 나, 테레비(그 세대 일본식 단어는 못 버렸다) 싫어해!”
TV와 거리 두기를 한 곳엔 책과 그림이 자리했다. 친분 깊었다는 천경자 화백의 여인 스케치도 보였다. 화려하진 않아도 아취(雅趣)가 넘쳤다. 카메라가 휙휙 훑고 가는데, 디자인 애호가라면 환호할 장면이 스쳐갔다. 르코르뷔지에(1887~1965)의 ‘LC3 소파’, 미스 반 데어 로에(1886~1969)의 ‘바르셀로나 의자’, 마르셀 브로이어(1902~1981)의 ‘바실리 의자’라니! 20세기 디자인 아이콘으로 꼽히는 근대 건축 거장 세 명의 대표 디자인 가구가 한 앵글에 잡힌 것 아닌가. 르코르뷔지에 LC3는 애플 창업주 스티브 잡스가 발표 때마다 앉은, 바로 그 의자다(윤여정은 2인용). 미스 반 데어 로에는 또 어떤가. 디자인 잠언처럼 돼버린 “신은 디테일에 있다(God is in the details)”를 말한 건축가다.
“마흔 넘은 큰아들하고 동갑인 의자”라는 윤여정의 설명 없이도, 급조한 취향이 아니라 곰삭은 안목이 빚은 조합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최근 인테리어에 관심 많아져 ‘짝퉁’까지 등장할 정도로 유명한 가구가 됐지만, 기자가 10여년 전 기사 쓸 때만 해도 아는 이가 거의 없었다. 윤여정의 예술 안목이 얼마나 앞서갔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주인을 빼닮은 집을 보니, 20~30대 밀레니얼 세대가 왜 그들 인생의 곱절을 살아온 윤여정에게 환호하는지 알 것 같았다. ‘취향 존중’을 최고 가치로 삼는 젊은 세대의 눈에, 윤여정은 보기 드문 ‘취향 있는 어른’이다. 취향을 가진 어른은 꼰대일 수가 없다. 내 취향이 확실하기에 남의 취향에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인간 본성에 탐닉한 계몽주의 작가 라 로슈푸코의 말처럼 “생각이 비난받을 때보다 취향이 비난받을 때 자존심은 더 큰 상처를 입는다”는 사실을 잘 아니까.
윤여정 또래 세대가 취향 없는 세대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일례로 전시 기획자 지인은 20~30대를 겨냥한 현대 미술 전시에 예상보다 70~80대 관객이 많이 와 놀랐단다. 그는 “1960~1970년대 미니스커트 입고 장발 하면서 자유와 파격을 즐겼던 세대 아닌가. 먹고 사느라 잊었던 문화에의 갈구가 큰 것 같다”고 했다. ‘취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취향을 잊은 것’일지 모른다.
영화 미나리로 헌신과 희생의 아이콘 ‘K 할머니’가 주목받고 있다. 이젠 20~30대와 취향을 공유하는 ‘멋쟁이 K 할머니’도 많아졌으면 한다. 그렇다고 이 글을 읽고 ‘윤여정 의자’ 따라 사겠다고 하지는 마시길. 취향은 복사할 수 없으며, 유행 타는 순간 유효 기한이 끝난다. 잊고 산 당신의 취향을 되살려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