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8일 열린 관훈클럽 초청토론회.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가 말했다. “민주당 지지자는 자기 후보가 마음에 안 드는데 국민의힘이 정권을 잡을 수는 없지 않냐며 인질이 된 기분으로 찍으려 하고, 국민의힘 지지자도 그렇다.”
사실 ‘인질’이란 단어는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와 안 후보, 두 사람의 관계에 더 들어맞는 단어다. 둘은 서로를 옭아매고 있다. 서로가 상대방에게 인질이자 상대를 붙잡고 있는 인질범이다. 둘은 ‘단일화’라는 방정식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하지만 상대방이 판을 깨뜨리지 않고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풀어야 한다.
윤 후보 입장에서 한번 보자.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다. 자강론(自强論)과 단일화다. “상대 후보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던 윤 후보의 스탠스는 선거를 한 달 앞둔 시점부터 변했다. 단일화에 직접 메시지를 내기 시작했다. “단일화를 한다면 바깥에 공개하고 진행할 게 아니라, 안 후보와 나 사이에서 전격적으로 결정할 사안이다”(2월 7일 한국일보), “서로 신뢰하고 정권교체라는 방향이 맞으면 단 10분 안에도, 커피 한잔 마시면서도 끝낼 수 있는 것 아닌가”(2월 9일 중앙일보) 등등의 발언은 그 변화를 읽을 수 있는 단초다.
국민의힘 내부에서도 이런 발언과 발맞춰 후보 단일화 이야기가 쏟아지고 있다. “확률 높은 승부수를 놔두고 방치하는 건 직무유기니까. 이준석 대표와 윤 후보의 갈등이 봉합된 이후 단일화에 관한 질문은 이 대표가 답해왔다. 이제는 이 문제를 두고 캠프가 시동을 걸고 있다.” 선대본에 참여 중인 국민의힘 한 초선의원의 말이다. 단일화를 물으면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다”라며 전략적 무용론을 강조하던 이 대표 발언의 효용이 끝나가고 있다는 얘기다.
공격적 윤석열, 벗어나려는 안철수
단일화라는 소재로 윤 후보와 안 후보의 발언은 교차하고 있다. 윤 후보는 단일화라는 화두가 등장하면서부터 공세적으로 변했다. 최근 그의 인터뷰에는 몇 가지 힌트가 있다. 일단 ‘나’라는 주어다. “안 후보와 ‘나’ 사이에서 전격적으로 결정할 사안이다”라고 말하며 이 문제를 자신의 곁으로 가지고 왔다. 그동안 당대표가 말하던 단일화의 결정권 주체도 자신이라고 확인시켰다. “커피 한잔 마시면서도 끝낼 수 있는 것 아닌가”라는 발언도 마찬가지다. 자기 마음먹기 나름의 문제이고 언제든 가능하다는 암시를 주며 단일화라는 소재의 꼬리를 끊지 않는다. 여기에 더해 통 큰 모습을 보이며 우위에 서려는 느낌이다.
윤 후보가 인터뷰를 냈던 지난 2월 7일 측근의 입을 통해서 나온 또 하나의 발언이 있었다. 선거대책본부 핵심 관계자가 “단일화에서 여론조사 방식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라고 이야기했다. 담판 이외에는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두 후보의 급이 다르다는 얘기인데 두 발언이 한날 동시에 나온 걸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타이밍이 절묘하다. 단일화에서 안 후보는 종속변수라고 보는 시각이 반영된 발언이다. 사퇴하라는 종용으로 비칠 법했다. 단일화를 두고 양 후보 진영이 접촉을 해오고 있다는 소문도 있지만 정말 긴밀하게 움직이고 있다면 측근의 입을 통해서 “여론조사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건 매우 부적절하다. 그래서인지 윤 후보가 단일화를 말하고는 있지만 막상 단일화에 관심이 없다는 얘기도 들린다. 윤 후보 선대본 관계자도 “우리나 저쪽이나 단일화를 위한 실무단도 꾸린 적이 없는데 너무 앞서가는 이야기들이 많다”고 말했다.
안 후보의 대응은 즉각적이다. 한국일보 인터뷰에는 “이런 문제를 공개적으로 말한다는 것 자체가 진정성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인터뷰에는 “그 자체가 일방적인 생각이다”라고 선을 그었다. 두루뭉술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답한다. 안 후보 캠프 관계자는 “안 후보의 스타일을 생각한다면 우리 쪽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발언들이다. 단순히 단일화 프레임에 우리를 묶어두는 전략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안 후보의 스타일은 꼼꼼히 체크하고 논리적인 선후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계산적이라고 말하지만 이과 출신 CEO라는 전직을 고려할 때 본인 특유의 정치 스타일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전격적’ ‘10분’이라는 단어는 전형적인 윤 후보 중심의 단어다. 단일화라는 소재를 윤 후보가 활용하려고 하자 안 후보는 그 구심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빠르게 대응하고 있는 모양새다.
과거 단일화와 다른 전제조건들
단일화의 반대 지점에는 자강론이 있다. 자강론은 원래 이준석 대표의 시그니처 전략이다. 202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전략적 성공을 경험한 뒤 최연소 당대표가 된 그는 이번 대선에서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성공을 거두려고 한다. 그 중심에는 세대포위론을 중심으로 하는 자강론이 있다. 이 대표가 단일화를 단칼에 자르는 것을 두고 안 후보에 대한 사감(私感)과 연관 짓는 의견이 있지만 전략적 측면에 기인한 게 더 크다.
그는 만약 표를 위해서 야권 단일화를 했을 경우 세대포위론과 같은 전략이 무효화되는 측면이 있다고 본다. 김철근 국민의힘 당대표 정무실장은 야권 단일화가 득보다 실이 더 클 수 있다고 본다. “세대연합론을 흔드는 매우 위험한 시도이며 후보단일화론의 지난한 과정이 대선에 도움이 될 수 있는지도 회의적이다”라는 그의 지적은 이 대표가 우려하는 지점과 맞닿아 있다. 특히 실제 안철수 후보의 지지층들이 윤석열 후보로 이동할지를 데이터로 볼 때 그렇게 유의미하지 않은데 굳이 시도할 필요가 없다는 게 자강론의 입장이다.
이번 대선에서 자강론과 단일화가 등장한 책임은 오롯이 윤 후보에게 있다. 그가 가진 구조적 한계 때문이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 국정운영에 대한 긍정평가는 잘 나올 경우 40%가 넘는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지난 2월 4~5일 전국 만 18세 이상 101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국정수행 평가에서도 긍정평가가 43.9%였다. 그 직전 조사에서는 45.5%를 기록했다. 문 대통령이 지난 19대 대선에서 기록한 득표율이 약 41%였다. 숫자로만 따지면 스타트 라인에 섰을 때보다 더 높은 지지율을 기록 중이다.
반대로 문 대통령에 대한 국정수행 부정평가는 대략 50%대 초반을 기록 중이다. 앞선 KSOI 조사에서도 52.7%였다. 정권교체 여론의 추세와 비슷하다. 과반이 넘는 부정평가 여론을 윤 후보가 모두 안을 수 있었다면 단일화라는 논쟁적 소재가 끼어들 자리는 없다. 그걸 다 안지 못한 채 윤 후보의 개인 지지율이 40% 근처에서 맴돌아 생긴 문제다. 이 지점에서 정권교체 여론의 결은 두 갈래로 갈린다. 국민의힘 대선후보로의 정권교체를 바라는 다수, 그리고 제3지대 후보로의 정권교체를 원하는 소수가 있다. 전자가 대략 40%, 후자가 대략 10% 언저리 정도다.
이번 대선을 불확실한 안개 정국이라고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확실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건 후보 단일화다. 조선일보와 TV조선이 칸타코리아에 의뢰해 지난 2월 4~5일 전국 성인 100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대선후보 지지도 여론조사에서 윤 후보는 35.0%, 이재명 민주당 후보는 31.0%, 안 후보는 12.1%를 얻었다. 1~2위간 격차는 오차범위 내인 4%였다. 반면 야권 후보 단일화를 가정할 경우 윤석열(윤 42.4%, 이 30.3%)·안철수(안 45.6%, 이 25.7%) 누구든 이재명 후보를 오차범위 밖에서 앞서는 것으로 조사됐다. 단일화의 확실성이다.
다만 이번은 단일화를 앞둔 환경이 이전 경우와 다르다. 단일화는 몇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후보끼리 합쳤을 때 이길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단일화를 중재할 수 있는 외부 조직이 필요하다. 2017년 19대 대선 당시 ‘홍준표+안철수+유승민’ 대권 후보 간에도 단일후보 이야기가 있었는데 중재자로 ‘중도·보수 단일화 시민사회 원탁회의’라는 단체가 구성돼 나섰다. 합의 가능한 룰 세팅도 필요한 전제지만 이건 단일화에 관한 의지 표명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이번 단일화 과정에는 이런 전제들이 모두 무너졌다. 윤 후보 입장에서는 합치지 않아도 이길 수 있다. 두 후보 사이를 중재할 수 있는 단체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후보 선출을 위한 룰 대신 ‘톱다운(Top-down)’ 방식의 담판만을 제시하고 있다. 룰 세팅도 필요 없고 합의할 시간도 부족하다.
단일화도 자강론의 전술 중 하나
윤 후보의 단일화 언급을 자강론의 전술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이 대표의 자강론과 큰 틀은 같지만 디테일은 다르다. 제3지대 후보로의 정권교체를 원하는 소수의 크기를 줄이기 위해 단일화를 활용하는 모양새다. 제3지대로 가 있는 지지율의 규모는 지금과 같은 대선 구도에서 작지 않다. 오히려 다자구도 승리를 위해서 제3지대가 설 공간을 축소해야 하는데 단일화 논의가 등장한 것만으로도 효과적이다. 단일화라는 연기를 피워 안 후보를 범야권 진영으로 묶어 놓고 종속적인 위치에 놓는 것만으로도 정권교체 여론이 윤 후보 쪽으로 쏠리는 걸 기대할 수 있다. 안 후보의 공간이 좁아질수록 단일화로 내줘야 할 대가는 적어지고 당내 이해관계의 복잡한 계산도 단순해진다. 종국에는 단일화 없이 승리할 가능성도 높일 수 있다는 계산이다. 여러 효과를 얻을 수 있는데 굳이 ‘이준석식 경종’을 울릴 필요가 없다는 믿음이 윤 후보 측에 있다. 단일화 금지가 아니라 ‘단일화를 활용한 자강론’이다.
자강론으로 승리할 수 있다는 건 윤 후보에게 가장 좋은 시나리오다. 대신 자강론이 유지되는 동안 안정적 정권교체의 가능성은 잠시 접어둬야 한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국민의힘이 단일화보다 자강론에만 매달린다면 정권교체가 안 될 수도 있다”고 봤다. 1~2주 사이에 판이 요동치는 게 요즘 대선 판세라서다. 게다가 국민의힘 쪽에서도 문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도가 최근 상승하는 추세를 두고 주의를 요하는 목소리가 있다. 앞선 선대본 관계자는 “대통령 지지도는 이재명 민주당 후보 지지의 선행지표로 볼 수 있는데 최근 결과는 박빙 상황에서 여당 지지자들이 결집하는 시그널일 수 있다”고 말했다.
자강론을 아무리 고집한들 윤 후보가 확실한 우위를 점하지 못할수록 단일화의 불씨는 꺼지지 않는다. 단일화 마지노선으로는 2월 27일이 꼽힌다. 이날은 투표용지 인쇄 하루 전이다. 이때까지 둘 중 한 명이 물러나야 용지에 ‘사퇴’가 표기된다. 그렇지 않을 경우 투표소 안내문으로만 표기된다.
게다가 안 후보에게도 고민의 시간이 필요하다. 안 후보는 2012년 대선 때 대선후보 단일화 과정을 겪었던 장본인이다. 단일화를 할지 말지, 만약 한다면 얻어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야 하고 자신의 협상 자산이 될 지지율을 끌어올릴 시간도 필요하다. 다만 안 후보의 결단을 강조하고 있는 윤 후보 측이 2월 말까지 재촉하지 않고 느긋하게 지켜봐 줄지는 의문이다.(인용자료는 중앙선거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