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덕수 국무총리 후보자는 보수·진보 가리지 않고 앞선 네 정권에서 고위직을 두루 역임했다. 이명박 정부의 주미(駐美) 대사에서 물러난 지 10년 만에 관직에 복귀했다. 국무총리직에는 노무현 정부 이후 15년 만에 다시 지명됐다.
한 후보자는 김영삼 정부에서 특허청장·통상산업부 차관, 김대중 정부 들어서는 초대 통상교섭본부장·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을 거쳤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경제부총리, 국무총리를 차례로 지냈다. 정권 교체가 이뤄진 뒤인 이명박 정부에서도 주미 대사로 3년간 재임했다. 앞선 4차례 정부의 요직을 거친 뒤, 새로 출범하는 윤석열 정부에서 다시 국무총리 후보자로 귀환한 것이다. 국회가 인준에 동의할 경우 한 후보자는 김종필, 고건 전 국무총리에 이어 두 정권에서 총리직을 수행한 세 번째 국무총리가 된다.
한 후보자는 전북 전주 출생으로 경기고와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후 하버드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경제·통상 전문가다. 1970년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줄곧 기획재정부·산업통상자원부 등 경제 부처에 몸담았다.
통상 전문가로서 그는 “토끼는 한 평의 풀밭으로 만족하지만 사자는 넓은 초원이 필요하다”며 ‘개방론’을 주장했다. 통상교섭본부장 시절인 1998년 우리 정부의 수입차 개방 의지를 대외적으로 알리려 관용차도 외제차로 바꿨다. 당시 한 후보자 차량은 배기량 2300cc짜리 스웨덴 사브 ‘9-5′모델로 결정됐다. 장관급 고위 관료가 외제 관용차를 타기로 한 것은 당시로선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영화업계 반발에도 ‘스크린쿼터제 폐지’를 주장하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을 지내며 2005년 8·31 부동산 대책을 내놨다. 2003년 10월 도입된 종합부동산세를 더 강화하는 내용이었다. 또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체결지원위원장으로 협상 타결에 관여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미국 지방정부·의회를 돌며 “(한미 FTA로) 미국에도 일자리가 늘어난다”며 설득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이후 2007년 4월 노무현 정부의 마지막 국무총리로 지명됐다. 한 후보자의 총리 인준 표결은 그해 4월 2일로 한미 FTA가 타결되던 날이었다. 당시 국회는 한 후보자 임명동의안을 재석 270명 중 찬성 210표, 반대 51표, 무효 9표로 가결했다. 정권 말기였음에도 한 후보자가 높은 득표를 얻은 배경에는 한미 FTA에 찬성하던 당시 제1 야당 한나라당의 협조가 있었다는 분석이 많다. 실제 한 후보자는 한미 FTA 협상을 성공적으로 주도한 공을 인정받아 이명박 정부에서도 주미 대사로 발탁됐다.
공직 생활에 고비도 있었다. 통상교섭본부장으로 재직하던 2000년 7월에 한중 마늘 협상을 타결시켰는데 2002년 말로 끝나는 중국 마늘에 대한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 조치를 연장 안 하는 것으로 합의해 주고 이를 대외 공개하지 않아 뒤늦게 문제가 됐다.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2002년 7월 청와대 경제수석에서 물러났다. 이후 노무현 정부 출범 다음 해인 2004년 2월 국무조정실장으로 공직에 복귀했다.
한 후보자의 고향과 관련된 논란도 있다. 1970년 행정고시(8회)에 합격한 뒤 관세청 사무관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면서 고향을 서울이라 했다가 김대중 정부 때부터 전북 전주 출신이라고 말을 바꿨다는 것이다. 한 후보자는 이에 대해 “어려서 일가족이 전주에서 서울로 올라오며 부친이 본적(本籍)을 서울로 변경해 공직자 신상기록에 그렇게 적어낸 것”이라며 “한 번도 내 입으로 서울이 고향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청문회에서 떳떳하게 답하겠다”고 했다.
한 후보자는 정파색이 옅어 ‘무색무취’라는 평가를 받는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호남 출신으로 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권에서 고위직을 역임한 한 총리에게 국민 통합 상징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에서 국회 인준이 비교적 수월할 것이라는 분석 또한 한 후보자의 발탁 요인으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