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하얼빈 동계아시안게임 개막식 참석차 방중한 우원식 국회의장에 제공한 중국 측의 각별한 의전을 두고 여러 말들이 나온다. 우원식 의장은 중국의 국회 격인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초청으로 지난 2월 5일부터 9일까지 4박5일간 중국 베이징·하얼빈·선양 등지를 순방했다. 이 기간 중 카운터파트인 중국공산당 서열 3위 자오러지(趙樂際) 전인대 위원장은 물론, 서열 1위 시진핑 중국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 하오펑(郝鵬) 랴오닝성 당서기, 리러청(李樂成) 랴오닝성 성장, 왕신웨이(王新偉) 선양시 당서기, 한팡밍(韓方明) 차하얼학회 회장(전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외사위원회 부주임) 등 중국의 각급 지도자들을 두루 만났다.
이 과정에서 시진핑 주석은 우 의장을 별도 접견하는 등 각별한 성의를 표했다. 문재인 정부 때인 2022년 2월,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막식 참석차 박병석 전 국회의장이 베이징을 찾았을 때 박 의장과 시 주석의 별도 면담은 불발됐다. 대신 박 전 의장은 각국 축하사절단과 함께 시 주석이 주최한 환영오찬에 참석하는 데 그쳤다. 역시 문재인 정부 때인 2019년 문희상 전 국회의장이 베이징을 찾았을 때도 리잔수(栗戰書) 당시 전인대 위원장과 왕치산(王岐山) 당시 국가부주석, 양제츠 당시 중앙외사공작판공실 주임과의 만남만 성사됐을 뿐 시 주석과의 면담은 끝내 불발된 바 있다.
2023년 9월 항저우 하계아시안게임 개막식 참석차 한덕수 국무총리가 항저우를 찾았을 때 시 주석과 별도 회담이 이뤄졌지만 국무총리 신분이었다. 중국을 찾은 역대 국회의장과 시 주석 간 개별 면담이 성사된 것은 박근혜 정부 때인 2014년 방중한 정의화 전 의장 이래 11년 만이다. 이날 만남은 하얼빈 타이양다오빈관(호텔)에서 약 40분간 열렸는데, 정의화 전 의장 때와 마찬가지로 양자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얘기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하얼빈을 휘감고 흐르는 쑹화강의 하중도인 타이양다오(太陽島)에 있는 타이양다오빈관은 하얼빈의 영빈관으로 2010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머무른 곳이기도 하다.
국회의장실에 따르면, 우원식 의장은 이 자리에서 “한·중 관계는 수교 이래 30여년간 정치, 경제, 문화, 인적교류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뤄왔다”며 “비록 비상계엄 사태를 겪었지만 대한민국은 이 위기를 반드시 극복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시진핑 주석은 “한국 국민들이 내정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고 화답한 것으로 알려진다.
중국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도 하얼빈 동계아시안게임 개막식 참석차 중국을 찾은 각국 정상과 시 주석과의 만남을 보도하면서 우원식 의장과 만난 사진을 신문 2면 우측 최상단에 배치했다. 이날 인민일보는 ‘회견(會見)’이란 표현을 썼다. 한 전직 외교관은 “상호대등한 관계에서 만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회담보다는 면담 또는 접견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고 말했다.
중국 측의 이례적 환대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복귀 후 심화되는 대중압박을 돌파하기 위한 외교적 제스처로 풀이된다. 미국은 하얼빈 동계아시안게임 개막 직전인 지난 2월 4일 0시부로 중국산 상품에 대한 10% 추가관세 부과를 강행하면서 잔칫집에 찬물을 끼얹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백악관 복귀 후 미국 눈치를 살피면서 동계아시안게임 개막식에 참석한 외빈 규모 역시 현저히 축소됐다.
개막식 당일 시진핑 주석 내외가 주최한 환영오찬에 참석한 정상급 해외인사는 우원식 의장을 비롯, 태국 총리, 파키스탄 대통령, 키르기스스탄 대통령, 브루나이 국왕,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 정도가 전부였다. 자연히 환영오찬 참석인원은 시진핑 주석과 펑리위안 여사를 제외하고 모두 9명으로, 2023년 항저우 하계아시안게임(12명)보다 숫자가 줄었다.
직전 대회인 2017년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에서 종합순위 5위 안에 든 국가 중 한국(2위), 중국(3위)을 제외하고 일본(1위), 카자흐스탄(4위), 북한(5위)은 정상급 축하사절을 파견하지 않았다. 개최국인 중국으로서는 체면을 구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직전 동계아시안게임(2017년 삿포로) 개최국이자 오는 2026년 아이치·나고야 하계아시안게임 개최국인 일본이 정상급 축하사절을 파견하지 않은 것은 의미심장하다.
일본 교도(共同)통신에 따르면, 주일 중국대사를 지낸 중국 외교사령탑 왕이(王毅) 중국공산당 중앙외사공작판공실 주임 겸 외교부장은 지난 1월 베이징을 방문한 일·중 우호의원연맹 회장 모리야마 히로시(森山裕) 자민당 간사장에게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일본 총리의 하얼빈 동계아시안게임 개막식 참석을 비공식 타진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일본 측은 일정상 이유로 난색을 표명한 것으로 알려진다.
日 이시바, 중국 대신 미국행
실제로 하얼빈 동계아시안게임 개막식 전날인 지난 2월 6일, 이시바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과 미·일 정상회담을 위해 워싱턴으로 날아갔고, 7일 오전(현지시간) “미·일 안전보장조약 제5조가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에 적용된다” “무력이나 강압에 의한 대만해협의 일방적 현상변경에 반대한다”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해 중국의 신경을 긁었다.
일본은 대신 주중 일본대사를 지낸 요코이 유타카(橫井裕) 일본 올림픽위원회 부회장이 하얼빈을 찾는 데 그쳤다. 트럼프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는 북한 역시 김일국 체육상을 하얼빈에 보내는 데 그쳤다. 북한 올림픽위원장을 겸하는 김일국 체육상은 2023년 항저우 하계아시안게임 때도 모습을 드러낸 바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정부 대표인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외에 의전서열 2위 우원식 의장까지 직접 하얼빈을 찾아오자 중국으로서는 반색한 것. 우 의장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사법리스크가 현실화할 경우, 조기대선 시 출마가 거론되는 야권의 유력주자 중 한 명이다. 여기에 우 의장은 부부동반으로 환영오찬에 참석해 펑리위안 여사의 체면도 세웠다. 환영오찬에 부부동반으로 참석한 것은 시 주석 내외를 비롯해 키르기스스탄 대통령 내외, 우 의장 내외 세 쌍이 전부였다.
다만 전 세계가 트럼프의 눈치를 보는 와중에 중국을 찾아 각별한 환대를 받은 것이 어떤 청구서로 되돌아올지는 미지수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월 10일 “모든 철강과 알루미늄에 예외나 면제 없이 25% 관세를 부과한다”는 행정명령을 발표했다. 트럼프 집권 1기 때인 2018년 수출물량 쿼터제(연간 263만t) 수용을 바탕으로 받아낸 한국산 철강 관세 예외조치도 오는 3월 12일부로 폐기될 운명이다. 트럼프는 한국의 주력 수출품목인 자동차와 반도체에 대한 관세도 공언하고 있다.
한편 국회의장실 측은 “국회의장과 시진핑 주석의 단독 면담은 11년 만으로 지난해 12월 비상계엄 사태 이후 한국 고위인사를 공식적으로 처음 만난 것”이라며 “시 주석과 단독 회담을 통해 한·중 경제협력 확대 및 문화교류, 경주 APEC 계기 시 주석 방한, 중국 내 독립 유적지 보존 등 한·중 관계 발전 방안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는 의미 있는 성과가 있었다”고 자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