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장과 국무총리, 정당 대표 등을 지낸 여야(與野) 정치 원로 12명이 4일 정치권을 향해 “대통령 및 국회의 권력을 분산할 수 있도록 통치 구조를 개편하는 ‘원 포인트 개헌’을 조속히 실시해야 한다”고 했다. 계엄·탄핵 사태로 대통령 권력과 다수당 중심 의회 권력의 충돌이 정치적 파국을 불렀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 원로들이 개헌 토론회를 열고 대통령·국회의 과도한 권력을 분산하는 개헌을 통해 정치적 해법을 모색하자고 촉구하고 나온 것이다. 여야 원로들은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개헌의 적기”라고 했다.
여야 원로들은 이날 서울대에서 ‘국가 원로들, 개헌을 말하다’란 제목으로 토론회를 열었다. 토론회에는 정세균·박병석·김진표 전 국회의장과 정대철 헌정회장, 정운찬·김황식·이낙연·김부겸 전 국무총리,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 모두에서 비상대책위원장을 지낸 김종인 전 의원 등 여야 원로 12명(서면 참석 3명 포함)이 두루 참석했다. 해외 일정 등으로 참석하지 못한 김형오·강창희·정의화 전 국회의장 등도 개헌 필요성을 담은 서면 의견서를 토론회에 보내왔다. 유홍림 서울대 총장이 환영사를 하고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장을 맡고 있는 강원택 교수가 사회를 맡았다. 신성범·최형두 국민의힘 의원도 참석했다.
이날 토론에선 여야 극한 대립의 원인이 1987년 개정된 현행 9차 개정 헌법에 있다는 진단이 잇따라 나왔다. 이른바 ‘87년 체제’가 권위주의 체제에서 민주화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지만, ‘제왕적 대통령’과 ‘다수당 독주형 의회’의 충돌이 지속되면서 정치적 갈등과 혼란을 낳는 등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이다. 대통령과 국회란 막강한 이중 권력의 충돌로 인해 전직 대통령 구속, 현직 대통령 탄핵에 이어 윤석열 대통령까지 탄핵소추와 함께 현직 신분으로 구속되는 파국을 맞은 만큼 개헌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정세균 전 국회의장은 토론회에서 “과반인 개헌 찬성 여론은 개헌을 하면 최소한 지금보다는 정치가 잘될 것이란 기대감이 반영된 것”이라며 “개헌을 통해 정치가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다면 시도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다. 김종인 전 의원은 “87년 체제 이후 세 번이나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의결됐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한국의 놀라운 경제 발전, 민주화 등은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했다. 김부겸 전 총리는 “공동체가 더 이상 망가지는 것을 막기 위해선 개헌이 필요하다는 것을 호소한다”고 했다.
개헌 방향과 관련해서는 주로 권력 구조 개편에 집중하는 ‘원포인트’ 개헌이 거론됐다. 현행 5년 단임 대통령의 임기를 1년 줄이는 대신, 한 차례 더 할 수 있도록 하는 ‘대통령 4년 중임(重任)제’, 의회 다수당이 행정부 구성권을 갖는 ‘의원내각제’ 등이 권력 구조 개편안으로 논의됐다. 김황식 전 총리는 “의원내각제가 우리가 가야 할 길”이라며 “직업으로 정치를 해온 인물이 정치를 해야 한다. 아무리 인물이 훌륭하더라도 정치적 경륜 없이 느닷없이 구름을 타고 나타나서 대통령이 되는 체제는 불안하다”고 했다. 반면 이낙연 전 총리는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뽑겠다는 요구가 만만치 않다. 국회가 행정 권력까지 만드는 건 국민이 수용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이번엔 분권형 대통령제로 가는 것이 맞는다”고 했다.
헌법을 고치려면 국회에서 재적 의원의 3분의 2(200명)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 개헌안 국회 통과 후 30일 이내 국민투표에서 과반 투표와 과반 찬성이 나와야 확정된다. 개헌 논의가 진전되려면 국회 과반 의석의 민주당을 이끄는 이재명 대표의 의지가 중요하다. 이 대표는 2022년 대선 당시 분권형 대통령제를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최근엔 ‘탄핵이 우선’이라며 개헌 문제에 침묵하고 있다.
정대철 헌정회장은 “개헌의 국민적 요청이 어느 때보다 강한데 이번에도 개헌을 이뤄내지 못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면서 “이 대표 혼자만 ‘개헌’에 침묵하고 있는데 이 대표에게 압력을 가해야 한다. (이 대표를 설득해) 선(先)개헌, 후(後)대선을 치러야 한다”고 했다. 박병석 전 국회의장은 “(대통령 임기를) 3년으로 단축하되, 중임의 길을 터줘 유력 후보도 개헌에 찬성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최근 오세훈 서울시장, 유승민 전 의원,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 등 여권 주요 인사들이 “2028년 총선에 맞춰 차기 대통령 임기는 3년으로 단축하자”고 주장한 가운데, 이 대표가 개헌 논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중임제 도입 논의도 병행해야 한다는 취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