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가 20일 역대 세 번째 국민연금 개혁안을 국회 본회의에서 합의 처리하면서 기금 소진 시점은 2055년에서 2064년으로 9년 늦춰졌다. 국민연금은 1988년 제도 도입 당시 가입자 유치 등을 위해 내는 돈은 적고, 받는 돈은 많은 기형적인 구조로 설계됐다. 기금이 지속 가능하려면 ‘더 많이 내고, 더 적게 받는’ 방향으로 개혁하는 게 필수적이다. 하지만 표를 의식한 정치권은 그간 연금 개혁을 외면하거나 관련 논의에 소극적이었다. 이 바람에 2007년 2차 개혁 이후 18년이 지나서야 3차 개혁이 이뤄지게 됐다.

그래픽=김성규

국민연금 제도가 도입된 첫해인 1988년엔 보험료율(내는 돈 비율)은 3%, 소득 대체율(받는 돈 비율)은 70%였다. 보험료를 내는 데 대한 가입자 불만을 줄이려고 적게 내고 많이 받는 구조로 설계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연금 재정상 지속 불가능한 방식이었다. 이에 따라 김대중 정부 때인 1998년 보험료율을 9%로 올리고, 소득 대체율을 60%로 낮추는 1차 연금 개혁이 성사됐다. 60세였던 연금 수급 개시 연령도 2013년부터 5년 주기로 1세씩 늦춰 2033년까지 65세로 높이기로 했다. 2차 개혁은 노무현 정부 때인 2007년 이뤄졌다. 소득 대체율을 50%로 내리고 해마다 0.5%포인트씩 더 줄여서 2028년까지 40%로 낮추기로 했다.

하지만 이후 연금 개혁 논의는 공전을 거듭하면서 지지부진했다. 이명박 정부 때는 전임 노무현 정부 임기 말 2차 연금 개혁이 있었다는 등의 이유로 밀도 있는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는 공무원 연금 개혁에 집중하면서 국민연금 개혁이 후순위로 밀렸다. 박근혜 정부는 2015년 ‘연금 지급률 단계적 인하, 지급 개시 연령 연장, 연금액 한시 동결’ 등을 골자로 한 공무원 연금 개혁에 성공했지만 국민연금 개혁엔 나서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는 2018년 ‘현행 유지’ ‘현행 유지하되 기초 연금 40만원으로 인상’ ‘보험료율 12%, 소득 대체율 45%’ ‘보험료율 13%, 소득 대체율 50%’ 등 4가지 복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가 반발 여론이 커지자 이를 철회했다.

그래픽=김성규

이명박·박근혜·문재인 정부에서 손을 대지 못한 국민연금 개혁의 불씨는 2022년 3·9 대선을 한 달 앞두고 열린 TV 토론회에서 여야 후보 전원이 개혁 필요성에 동의하면서 되살아났다. 윤석열 정부 출범 직후인 2022년 7월 국회에 연금 개혁 특위가 설치되며 여야가 본격적인 개혁안 논의에 나섰다. 여야는 21대 국회 임기 만료 직전인 지난해 5월 ‘보험료율 13%, 소득 대체율 43~45%’로 접점을 찾았다. 그러나 윤 대통령과 국민의힘이 “구조 개혁도 같이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최종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작년 4월 총선에서 여당인 국민의힘이 참패하면서 현 정부의 연금 개혁 동력도 약화했다. 하지만 계엄·탄핵 사태로 정부 리더십이 약화한 상황에서 여야 간 논의가 급진전되면서 여야가 ‘보험료율 13%, 소득 대체율 43%’ 안에 합의해 국회에서 이날 처리했다.

국민연금의 장기 재정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5년에 한 번씩 발표하는 ‘재정 추계’는 연금 개혁의 시급성을 경고했다. 재정 고갈을 막으려면 보험료율을 올리는 게 불가피했지만, 연금 개혁은 인기 없는 과제였고 실제로 정치권은 적극적으로 나서지도 않았다. 이런 가운데 저출생·고령화 심화와 경기 둔화 등의 영향으로 기금 소진 시점은 더 앞당겨졌다. 한 연금 전문가는 “기금 적자가 눈앞에 보이면 더 많은 돈을 내야 한다는 건 상식에 가까운 해법”이라며 “그 당연한 정답에 이르는 데 18년이 걸린 것은 한국 정치가 얼마나 비효율적으로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고 했다.

정치권에서는 이번 연금 개혁안을 두고 ‘반쪽 개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연금 개혁 논의에 관여해 온 한 의원은 “기금 고갈 시점을 9년 늦추는 것은 재정 안정성 측면에선 폭탄을 뒤로 미룬 것밖에 되지 않는다”며 “자동 조정 장치 도입과 구조 개혁 등 후속 조치를 이어가야 한다”고 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연금 개혁은 윤석열 정부가 추진해 온 핵심 개혁 과제로 미래 세대를 위해 지속 가능한 연금 개혁이 완성되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며 “국회에서 정치적 유불리를 떠나 성의를 갖고 논의해야만 합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