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5월 27일 한·일·중 정상회의 공동기자회견 뒤 퇴장하는 모습. photo 뉴시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5월 27일 한·일·중 정상회의 공동기자회견 뒤 퇴장하는 모습. photo 뉴시스

그에게 전화를 받았던 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지금처럼 여의도 일대 벚꽃나무에 꽃망울이 하나둘 맺힐 즈음이었다. 나는 3호선 지하철을 타고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었다.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는 잘 받지 않는 터라 그날도 전화를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도발적 음성이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자네가 박혁진인가? 나 윤석열이네.”

잠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지하철 문 옆 손잡이에 기대고 있던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세웠다.

‘윤석열? 그 윤석열 검사?’

뜻밖의 전화에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머리와 달리 입으로는 매끄러운 대답이 나갔다.

“아! 검사님! 반갑습니다. 제가 박혁진입니다. 이렇게 연락을 주시고 감사합니다.”

그날 윤 검사는 내가 아는 검찰 인사와 저녁을 먹다가 “네 기사를 잘 봤다”며 전화를 걸어왔다. “내가 말이야”라면서 ‘썰’을 푸는 특유의 화법은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기사를 잘 봤다’는 갑작스러운 인사에 더 혼란스러웠다. 그날 윤석열 검사가 말한 기사는 전화를 받았던 시점으로부터 약 2년 반 전인 2013년 10월의 기사를 말하는 듯했다.

2013년 가을, 검사 윤석열은 여주지청 지청장으로 근무하다가 채동욱 검찰총장의 제안을 받고 국가정보원 댓글사건 수사팀장을 맡았다. 윤 검사가 지휘하는 수사팀은 이명박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의 댓글 공작 관련 수사를 진행했고, 결국 원세훈 전 국정원장으로 칼끝을 향했다. 이 사건은 박근혜 정부 정통성에 치명타를 가져올 수 있는 사건이었다. 결국 이 사건이 빌미가 돼 윤석열 검사는 국회 국정감사장에 나와 검찰 수뇌부를 저격했다. 이때 나왔던 말이 그 유명한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다. 당시 여당이었던 새누리당 의원들은 윤 검사의 이러한 행동을 ‘항명’이라고 표현했고, 야당은 ‘진짜 검사’라고 극찬했다.

2013년 10월 나는 주간조선 2279호에 ‘누가 윤석열을 돌직구로 만들었나’ 제하의 기사를 썼다. 당시 박근혜 정권에 칼을 들이대던 검사 윤석열이 초임 검사였던 김대중 정권 시절에는 경찰청 정보국장을 구속한 일, 노무현 정권 시절 대선자금 수사를 했던 일 등을 거론하며 검사 윤석열의 과거를 조명했다. 전두환 정권 시절 서울대 법대 재학생 윤석열이 학교 모의재판에서 검사 역할을 맡아 전두환 대통령에게 사형을 구형했다는 에피소드가 이 기사에 처음 등장한다. 이 에피소드는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입에서 회자되고 있다. ‘광주(光州)’가 대통령 후보 시절 그를 따뜻하게 맞이한 이유 중 하나라고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후에 직접 그와 만나는 자리에서 들은 얘기지만 본인은 엄밀히 말하면 이 기사는 ‘오보’라고 했다. 자신은 그 모의재판에서 사형을 구형한 검사가 아니라 사형을 선고한 판사였다고 바로잡았다. 당시 검사는 서울대 법대 동기생이었던 문병호 전 국회의원이었다고도 했다. 그는 “아무튼 수십 년 전 그 에피소드를 어떻게 알았냐”며 놀라워했다.

정작 당사자는 기사를 쓴 지 2년 만에 반응했지만, 처음 기사를 썼을 때 보수 진영이 발끈했다. 당시 박근혜 정부를 지지하던 사람들이 나와 주간조선을 향해 돌을 던졌다. 어떻게 ‘검사동일체’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조직에서 상부에 항명한 검사를 구국의 영웅으로 만들 수 있냐는 항의성 메일이 들어왔다. 지금도 한 보수논객의 사이트에는 이 기사를 향해 ‘윤석열을 영웅으로 띄우는 조선일보에 경고’ 등등의 댓글이 버젓이 남아 있다. 내가 이 기사를 계기로 검사 윤석열과 알고 지냈던 것을 몇몇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 그런 지인들은 지난해 12월 3일 대통령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하자 나를 향해 “너도 이 사태에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그때는 우파가 나를 비난했고, 언제부터인가는 좌파가 나를 비난했다.

사실 그때나 지금이나 나와 내가 속한 매체는 검사 윤석열에 대한 기사를 쓰면서 정치적 고려를 한 적이 없다. 새누리당이 그를 향해 ‘정치 검사’라며 돌팔매를 던졌지만, 취재과정에서 듣게 된 윤석열은 강직한 검사였다. 적어도 그 시절 내 판단은 그랬다. 나는 취재한 에피소드를 있는 그대로 기사에 담았을 뿐이다.

2013년 10월 21일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의 특별수사팀장이었던 윤석열 당시 여주지청장이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검찰청에서 열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국정감사가 정회되자 기자들의 질문을 받으며 국감장을 나가고 있다. photo 뉴시스

검사 윤석열에서 정치인 윤석열로

당시만 해도 그를 잡아먹으려 들었던 현 여당은 약 10년 후 그를 내세워 정권을 되찾았다. 반대로 10년 전 그를 국회로 불러 언론사 카메라 앞에 세워 박수를 치던 야당과 그 지지자들은 지금 그에게 저주를 퍼붓는다.

나는 이익에 따라 편을 가르고, 아군과 적군을 쉽게 뒤바꾸는 일이 정치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러한 정치 행위가 사회 곳곳으로 퍼져나갔을 때 ‘사회의 정치화’가 이뤄질 수 있다는 걸 요즘 느낀다. 그래서 정치가 개입해서는 안 되는 영역이 있다고 믿는다. 민주당이 검찰총장이나 지검장 등을 불러 검찰 관련 사안을 따져물었던 오랜 관행을 깨고 한낱 부장검사였던 윤석열을 국정감사장으로 불러내 온 국민 앞에 세운 그날, 검찰은 그리고 검사 윤석열은 정치의 영역으로 깊숙이 들어왔다고 본다. 그리고 검사 윤석열이 정치인 윤석열로 바뀌는 계기가 됐다고 생각한다.

나는 대통령 윤석열을 이해하려면 그가 대구고검과 대전고검을 떠돌며 이른바 ‘유배’ 생활을 했던 때를 알아야 한다고 감히 말한다. 첫 전화 통화 후 그를 만난 건 두어 달 뒤 대전고검 앞 한정식집이었다. 그의 두 번째 유배지였다. 기자가 사람을 만나는 모든 일이 취재의 영역이지만, 그날 나는 그를 취재한다고 생각하고 만나지 않았다. 대구에서 대전으로 왔을 때, 검찰 내에서는 ‘그가 끝났다’는 평가가 많았다. 불명예 퇴직을 앞둔 검사에게 기대할 게 없다고 다들 생각했다. 큰 덩치가 인상적이었지만 그가 입었던 남루한 옷들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나는 유배 중입니다.’ 앉자마자 폭탄주를 마실 줄 알았던 그의 음주 철학은 확고했다. 그는 “술을 마시기 전 배를 채워야 한다”고 했다. 20분이었는지 30분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몇몇 음식들로 먼저 배를 채우고 본격적으로 술잔이 돌았다. 어느 학교를 졸업했는지, 기자 생활을 얼마나 했는지, 전두환 에피소드를 어디서 들었는지 등등 가벼운 이야기가 오갔다.

그러면서 그의 수사팀장 시절 이야기,대구고검과 대전고검 생활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암초를 만났던 수사가 퇴직을 앞둔 국정원 한 직원의 이메일 포렌식을 근거로 급물살을 탄 얘기, 국정원 댓글사건에서 자신을 도왔던 박형철 검사가 인사에서 불이익을 받자 자기도 사의를 표명했다는 이야기 등이 이어졌다.

그날 검사 윤석열은 “이런 생활을 하면서 내가 느끼는 건 ‘상황이 어려워지자 피아식별이 확실해졌다’는 점”이라고 말한 것으로 기억한다. 오랜 특수부 검사 생활로 잘나가던 자신이 막상 대구와 대전을 떠돌며 옷을 벗을 위기에 처하자, 자신에게 잘했던 사람들이 대부분 떠났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몇몇 에피소드를 얘기했는데, 그가 느낀 배신감들이 이해가 됐다.

윤석열 정부 들어서 인사에 대한 말들이 많았다. 윤 대통령은 유독 인사 문제에 대한 고집이 셌다. 국회 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한 후보자들도 거침없이 장관으로 임명했다. 언론은 물론이고, 여당 내에서도 ‘한남동 라인’이라고 불리는 참모들에 대한 경질 요구가 계속됐지만 그들을 내보내지 않았다. 정권 초반 이른바 ‘윤핵관’으로 불리는 한 의원이 자신의 사람들로 대통령실을 채우고, 윤 대통령이 반대하던 법안을 덜컥 야당과 합의해 버린 일이 있었다. 이 의원은 더 이상 대통령과 독대할 수 없었다는 얘기를 대통령실 관계자로부터 전해들을 수 있었다.

비상계엄에 반대하고 탄핵에 찬성한 여권의 한 의원은 탄핵 후 이런 말도 했다. 이 말을 듣고 윤석열 정부 인사에 대해 내가 생각해온 가설과 비슷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적으로만 보면 불쌍하다. 주변에 믿을 사람이 없다. 그래서 욕을 먹어도 한남동 라인이니 뭐니 해도 그들을 쓰는 거다. 왜냐? 한남동 라인이 여사 라인이라고 해도, 여사는 가족이고, 가족은 가장 마지막까지 배신을 하지 않으니까….”

국정원 댓글사건으로 좌천되기 전 거의 15년을 특수부 검사로만 살았던 그에게 대구와 대전에서의 생활은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걸로 보인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에서 부활한 후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그는 ‘배신할 것 같은 사람들은 절대 쓰지 않는다’는 것을 인사의 제1원칙으로 세웠던 것은 아닐까.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수사를 맡은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2016년 12월 21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마련된 특검 사무실에서 본격적인 수사 개시를 알리며 현판식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어방용 지원단장, 윤석열 수사팀장, 양재식 특검보, 박충근 특검보, 박영수 특검, 이용복 특검보, 이규철 특검보, 조창희 사무국장. photo 연합

그에게 정치인으로서의 가능성이 열렸던 시기는 꽤 오래전이었다. 2015년 2월 민주당은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당대표로 맞이했다. 2016년 4월 총선을 몇 개월 앞두고는 인재영입위원장을 겸임했다. 윤석열의 말에 따르면, 당시 문 대표는 윤석열 검사에게 수차례 총선 영입의사를 타진했다고 한다. 이때 메신저 역할을 한 것이 문 대표 측근이었던 양정철 전 청와대 비서관이었다. 윤석열이 검찰총장 후 정치권에 뛰어들자 삼권분립 위반이라고 흥분했던 민주당이 사실은 2015년부터 윤석열에게 먼저 손을 내민 것이다. 문재인 대표는 대통령이 된 후 그를 서울중앙지검장에 파격승진시킨 후 검찰총장으로 임명했다. 정치 제안을 했을 때 손사래를 친 일을 높이 평가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윤석열에게 정치인으로서의 가능성과 미래를 열어준 것은 결국 민주당이었다고 본다. 물론 비상계엄은 전혀 다른 문제라고 반론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국가적 비극 앞에 마치 과연 그들은 아무 책임이 없다는 듯이 환호만 할 수 있는 것인지 묻고 싶다.

대전을 찾은 날, 검사 윤석열과 2차로 맥주집에 갔다. 지인 몇몇이 합류했다. 대전지검과 고검에 있던 검사와 연구관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몇 잔을 마시다 앉은 자리에서 잠이 들었다. 주량이 세다고 들었는데, 잠이 든 그를 보면서 ‘그래도 검사보다 기자가 세지’라며 흐뭇해했다. 그날 온 사람들이 윤석열이 잠들자 안타깝다는 얘기를 늘어놨다. “좋은 사람이고, 훌륭한 검사인데 이렇게 됐다”고 말했다. 그 말에는 더 이상 검사로서 다른 일을 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묻어났다. 그들이 윤석열을 부축해 나갔고, 나는 KTX 막차를 타러 대전역으로 이동했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그로부터 “먼저 취해서 배웅을 못 했는데 잘 들어갔냐”며 전화가 왔다. ‘미안하다’는 검사의 전화를 받은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이후로 몇 차례 검사 윤석열과 개인적 만남을 이어갔다. 개인적 만남이라고 표현한 건 그때나 지금이나 그가 했던 말들을 가지고 기사를 써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녹음도, 구체적인 메모도 하지 않았다. 만난 다음날 인상적 내용들만 간략하게 적었다.

2019년 7월 25일 문재인 당시 대통령이 청와대 본관에서 윤석열 신임 검찰총장 임명장 수여식을 마치고 환담장으로 향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우리 밖으로 나온 맹수

10여 차례 만남으로 한 사람의 모든 걸 설명할 수 없다. 그래도 그를 만났던 몇몇 날은 나름 국가적으로 의미가 있었기에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 그가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특검 수사팀장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던 날도 그중 하나다. 최순실 특검의 현판식 전날이었다. 국회로 점심약속을 가던 중 그에게 전화가 왔다. 11시40분경이었는데 “서초동 아크로비스타로 오라”고 했다. “내일부터 바빠서 오래 못 볼 텐데 점심이나 하자”고 했다. 세상에 어느 기자가 최순실 특검 수사팀장의 점심 식사 제안을 거절할 수 있겠는가. 취재원에게 양해를 구한 후, 택시를 타고 아크로비스타로 넘어가 지하 중식당 방 한 곳에 자리 잡았다. 술이 몇 잔 돌았다. 수사팀장을 제안받은 경위, 과거 두 차례 특검에 파견돼서 일했던 경험들을 늘어놓았다. 이날 만남은 그전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우리에 가둬졌던 맹수가 우리 밖으로 나가게 됐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 그간의 수사경험과 검찰 조직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털어놨다.

윤 전 대통령은 이명박 대통령 취임 후 BBK 특검에 파견돼 수사에 참여한 바 있다. 이 전 대통령이 대선 과정에서 받았던 의혹들에 대해 수사했다. 당시 특검은 결과적으로 이 전 대통령이 김경준씨가 운영했던 BBK와 연관이 없다는 결론을 냈다. 그 당시 윤 전 대통령이 말한 요지는 이렇다.

“사건을 일부러 덮었다고 주장하지만, 김경준이란 사기꾼에게 MB가 속았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민주당도 김경준에게 집중하느라 MB가 김경준이란 사람에게 속아 넘어갈 사람이라는 점을 간과했다. 당시 내가 특검 백서까지 만들어 기자들에게 배포했다. 이 백서를 본 사람들 중 수사에 문제가 있다고 했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는 7년 전 수사했던 사모펀드 투자사 이름까지 세세하게 외며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

그는 자신이 맡은 최순실 특검은 4개 팀으로 운영할 것이며, 수사에 따라 박 전 대통령의 소환도 가능하다고 밝혔다. 몇 년간 눌려 있던 ‘수사본능’이 폭발한 듯했다. 동시에 그가 생각보다 정치에 관심이 많다는 걸 처음 느꼈다. 윤 전 대통령은 “박근혜 정부가 위기에 처하자 우병우 당시 민정수석에게 청와대를 빨리 나오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전했다”고 했다. 윤 전 대통령의 말에 따르면 이 말을 중간에서 전한 것이 주진우 청와대 전 행정관(국민의힘 의원)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박근혜 정부 말기의 국정난맥상을 이야기했다. 그가 정치에 관심이 원래부터 많았던 것인지, 혹은 그즈음에 관심이 생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그의 분석은 꽤 그럴싸했으며, ‘정치인 윤석열’의 가능성이 엿보였다. 그는 그렇게 검사 윤석열이 아닌 정치인 윤석열로 바뀌어 가는 것으로 보였다.

그 이후 윤석열 전 대통령을 만난 건 중앙지검장 취임 후였다. 특검에서 기사가 줄줄이 쏟아져 나와도 안부만 물을 뿐, 자료를 준 적도, 달라고 한 적도 없다. 보통 법조출입기자와는 다른 방식으로 인연을 맺었던 터라, 만나서 취재 얘기를 하지 않고 과거의 사연들, 앞으로의 계획들을 이야기했다. 중앙지검장실에 처음 찾아간 날, 지검장실 안 TV에선 조윤선 전 청와대 정무수석이 구치소를 나오는 장면이 생중계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찾아보니 그날은 2017년 7월 27일이었다. 최순실 특검에서부터 수사를 받고 구속됐던 조 전 수석은 이날 1심 선고재판에서 블랙리스트와 관련해서는 증거가 약해 무죄, 국회 청문회 위증과 관련해서는 유죄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직접 수사를 했던 윤 지검장에게는 아쉬울 만한 일이었다. “아쉽지 않냐”고 물었다.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수사를 하고, 영장을 청구하는 것만으로도 역사는 조금씩 전진해 나가는 것”이라는 취지였다.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지만 ‘역사’ ‘전진’이란 말을 쓴 것은 분명하다. 윤 전 대통령의 언어는 정치인의 언어에 더 가까워졌다.

검사 때는 소통 뛰어나

윤석열 정부 2년 반 동안 아마 그가 가장 많이 들었던 비판이 ‘소통하지 않는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사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검사와 일반직, 이원 체계로 구성된 검찰에서는 드물게 일반직 수사관들과도 격의없이 지낸 사람으로 유명하다. 윤 전 대통령이 광주지검 검사였던 2000년대 초반부터 수사관 출신인 주기환 전 국민의힘 광주시당위원장과 가깝게 지낸 에피소드는 검찰 직원 대부분이 아는 이야기다. 현 대통령실 강의구 부속실장도 범죄정보기획관 시절부터 가깝게 지내다 결국 대통령실까지 데려갔다. 물론 다혈질의 윤 전 대통령을 싫어하는 사람도 검찰에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자신과 맞는 사람에겐 곁을 내어주고 소통했다. 정권 초반 윤석열 대통령을 잘 안다고 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급기야 윤 대통령이 비서실에 “나하고 친하다고 하는 사람은 내가 직접 확인해주겠다”고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에피소드는 누구나 격의없이 어울리고 소통했던 모습의 이면이라고 본다.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하고 언제부터인가 용산 사정을 잘 아는 인사로부터 “대통령이 유튜브를 보고, 저녁에는 만나는 사람들이 정해져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됐다. 비슷한 얘기가 여러 군데서 들렸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그의 가장 큰 강점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사라져가고 있다고 판단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2022년 5월 10일 국회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 선서를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정치인의 언어 사용

2020년 1월 6일 대검찰청 총장실에서 만난 그의 언어는 한결 거칠어져 있었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극한대립을 하던 시절이다. 윤 전 대통령은 한 시간 동안 여과없이 현 정권을 평했다. 내가 어떤 말을 해도 기사를 쓰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훗날 그가 당선되고 나서 그날의 대화를 한 차례 기사화한 바 있다. 그날 윤 전 대통령의 발언은 다음과 같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타고난 정치적 감각은 메시이고 호날두인데, 이 정권 사람들은 그걸 따라하려고 하지만 그만큼 되지는 않는다. 유스팀에서 아무리 잘해도 호날두나 메시가 될 수는 없는 것과 같다. 스페인 축구의 메시는 (재능을 알아본 팀에) 딱 스카우트돼 가지고 배웠다. 마드리드의 호날두도 사실은 시골 동네 이런 데서 컸는데 천부적으로 그런 걸(재능을) 가졌기 때문에 발탁이 됐다. (노 전 대통령은) 누구한테 발탁받지 못했지만 천부적으로 커온 그런 탁월한 정치인이다. 친노네 뭐네 하면서 누구의 정신 이런 말 하는데, 최고의 축구선수는 천부적인 스트라이커이고 타고난 거다. 축구하는 걸 보고 연구한다고 해서 그게 나올 수가 없듯이 천재가 뛰는 경기라고 하는 건 그걸 봐서 작전으로 운영하기가 불가능하다.” 당시 윤 전 총장은 “이 정권 사람들은 노무현을 자기 동업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는 말도 했다. “록펠러라는 거인이 미국을 먹여살렸는데 자기가 록펠러랑 동업자라고 착각하는 사업가들처럼 이 정권 사람들도 자기가 (노무현) 부하가 아니라 동업자라고 착각하는 그런 게 있다”는 의미였다.

정권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검찰총장이 자신을 임명한 대통령과 그 동료들을 거침없이 평한 것에 조금 놀랐다. 그는 문재인 정권을 발판삼아 자신의 정치적 욕심을 키워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또 한 편으로 놀라웠던 것은 검찰이 ‘자정’이 가능한 조직이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는 점이다. 검찰의 수장으로서 자신감을 내비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외부에서 검찰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잘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이후로 여러 지인을 통해 그에 대한 소식을 접했고, 통화도 여러 차례 했다. 윤 전 대통령은 만날 때마다, 혹은 이런저런 이유로 통화할 때마다 더 깊은 정치의 심연을 향해 나아가는 듯했다. 그것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알 수 없고, 그 동기가 무엇이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도 알 수 없다. 다만 주위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고, 호탕하게 배려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는 그의 모습을 어느 순간부터 마주하기 어려웠다고 느꼈다.

윤 전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3일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비상계엄이 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그날 밤 10시20분쯤 TV에 나와 계엄령을 발표하는 그의 모습이었다. 내 기억 속의 그가 아니었다. 상기된 표정에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그가 나라를 사랑하는 방식도, 야당의 행태에 대한 분노도 이해가 됐다. 그러나 계엄이란 방식을 택한 것은 이해가 불가했다. 내가 알던 윤석열은 술잔을 마주하고, 어깨를 두드리며 대화를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가 당선됐을 때 나는 누구보다 협치를 잘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런 기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극단의 언어를 쓰는 윤 전 대통령의 모습을 보며 의아했다. 무엇이 그를 극단의 골짜기로 밀어넣었단 말인가.

윤석열 대통령은 4월 4일 파면됐다. 헌법재판소의 선고를 기다리며 과거 윤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을 생각했다. 보수 진영은 돌을 던지고, 진보 진영은 칭송하던 그 시절의 검사 윤석열에 대한 생각이었다. 그 시절 검사 윤석열은 사람을 좋아하고, 수사 얘기만 하면 음식에 침을 튀어가며 신나서 말할 정도로 순수했다고 나는 기억한다. 그리고 항상 그는 넉넉했다. 사람을 대하는 것도 음식을 시키는 것도. 그래서인지 그가 조금만 더 다른 시각에서 소통하고, 자신과 다른 생각의 말을 너그러이 들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이 든다. 지금의 상황이 한편으로는 안타깝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행스럽다고도 생각한다. 어쩌면 헌재의 선고 이전보다, 이후 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이 나라의 앞길에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그가 야당에 경고하려 했던 마음이 뭔지도 알 것 같다. 그러나 양측의 에너지가 극단으로 표출되어 맞부딪치는 지금, 양측을 향한 넉넉한 마음과 언어, 그것이 극단을 되돌리는 시발점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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