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은 7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 개정안을 포함해 10여 개의 쟁점 법안을 늦어도 이번 주 안에 처리하겠다며 입법 강공 드라이브에 나섰다. 이에 국민의힘은 의원 50여 명이 법사위 회의장을 둘러싸고 피켓 농성을 벌이며 총력 저지로 맞섰다. 야당은 9일 정기국회 마지막 날엔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통해 법안 처리를 막겠다고 했다. 하지만 민주당은 곧바로 12월 임시국회 소집 요구서를 제출, 늦어도 오는 10~11일엔 공수처법 등 주요 법안을 여당 단독으로라도 통과시키겠다는 뜻을 명확히 했다. 여야가 연말 쟁점 법안 처리를 놓고 정면 충돌하는 모습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권력기관 개혁은 가장 큰 숙제 중 하나”라며 “공수처가 출범하게 되길 희망한다”고 했다. 그러자 민주당은 이번 주 공수처법 개정안 등 주요 법안을 모두 처리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문 대통령과 보조를 맞췄다.
민주당은 이날 법사위를 열고 공수처법 개정안 처리를 시도했다. 야당 반발로 개정안은 일단 법사위 안건조정위원회에 회부됐지만, 이르면 8일 민주당이 일방적으로 안건조정위를 종료할 가능성이 크다.
민주당은 또 국가정보원의 대공수사권을 경찰에 넘기는 국정원법 개정안, 자치경찰제 도입이 골자인 경찰청법 개정안, 상시 국회 체제를 도입하는 국회법 개정안 등을 이번 주 안에 처리하겠다는 방침이다. 이른바 ‘경제 3법’으로 불리는 상법·공정거래법 개정안·금융그룹감독법 제정안, 세월호 참사 진상조사위 활동 기한을 연장하는 ‘사회적 참사 진상 규명 특별법’ 등도 이번 주 국회 본회의에서 처리하기로 했다. 이날 법사위 법안심사소위에서 민주당 단독으로 통과시킨 ‘5·18 역사왜곡처벌법’, 택배기사 등 특수형태근로종사자의 고용보험 가입을 의무화하는 고용보험법 개정안 등도 본회의 부의 대상이다.
국민의힘은 “여당이 입법 독재를 하려 한다”면서 장외투쟁까지도 불사하겠다고 했다. 주호영 원내대표는 “야당이 취할 수 있는 모든 제도적 저항과 조처를 할 것”이라며 “합법적으로 막지 못하면 의사일정을 전면 거부하고 장외 투쟁에도 나설 것”이라고 했다.
野비토권까지 없애면서… 文 “새 민주주의가 열리는 시간”
문재인 대통령은 7일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 사태와 관련해 처음으로 사과했다. 그러나 “개혁을 위한 마지막 진통” “민주주의의 역사적 시간”이라며 더불어민주당에 공수처법 처리를 독려했다. 문 대통령은 검찰과 국정원의 독립과 민주주의를 강조했지만, 실제 여권이 추진하는 윤 총장 징계와 공수처법 강행은 정치권력에서 검찰을 독립시키겠다는 여권의 공언과는 거리가 멀다는 지적이다.
문 대통령은 “권력기관 개혁은 남은 가장 큰 숙제 중 하나”라며 “저는 취임사에서 권력기관을 정치로부터 완전히 독립시키고, 그 어떤 기관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수 없도록 견제 장치를 만들겠다고 국민들께 약속했다”고 했다. 그러나 최근 윤 총장에 대한 징계는 권력에 대한 수사를 막기 위한 것이라는 비판에는 답하지 않았다.
문 대통령은 “우리 정부는 헌법 정신에 입각해 어떤 어려움을 무릅쓰더라도 그 과제를 다음 정부로 미루지 않고자 했고 이제 그 노력의 결실을 맺는 마지막 단계”라고 했다. 국민의힘 등 야당이 공수처법 처리를 반대하고 있지만, 여당이 앞장서 공수처법을 처리하도록 독려한 것이다. 이와 함께 국가정보원의 대공 수사권을 경찰로 이관하는 국정원법, 자치경찰제를 위한 경찰청법 개정안 등의 처리도 함께 요구한 것으로 해석된다. 정권에 대한 수사와 대공 수사 모두 권력의 영향력 밑에 놓이게 될 위험성이 커질 수 있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따라 국정원, 검찰, 경찰 등 권력기관의 권한을 분산하고 국민의 기관으로 거듭나도록 개혁 입법이 반드시 통과돼야 한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이번 정기국회에서 권력기관의 제도적 개혁을 드디어 완성할 기회를 맞이했다”며 “한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장이 열리는 역사적 시간”이라고도 했다. 또 “위대한 촛불혁명을 거치면서 더욱 성장한 한국의 민주주의도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마지막 숙제를 풀어내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당초 야당에 약속했던 공수처장에 대한 비토권(거부권)을 무력화하는 공수처법 개정을 강행 처리할 방침이다. 민주당이 공수처법을 강행 처리하면 문 대통령이 강조한 ‘민주주의’나 야당과의 협치 약속과도 정면 배치된다.
문 대통령은 추 장관의 윤 총장의 무리한 징계에서 시작된 이번 사태에 대해 “방역과 민생에 너나없이 마음을 모아야 할 때에 혼란스러운 정국이 국민들께 걱정을 끼치고 있어 대통령으로서 매우 죄송한 마음”이라고 했다. 문 대통령이 이번 문제에 대해 공식 사과한 것은 처음이다. 문 대통령은 “한편으로 지금의 혼란이 오래가지 않고, 민주주의와 개혁을 위한 마지막 진통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했다. 대통령은 현재의 혼란이 오래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윤 총장은 징계에 대한 법적 대응을 진행하고 있고 추 장관은 징계를 예정대로 강행하겠다는 입장이다. 법원도, 법무부 감찰위도 절차적 문제를 지적했다. 문 대통령이 말한 대로 혼란을 정리하려면 윤 총장 징계를 철회하거나 충돌을 해결한 정치적 대안(代案)을 제시해야 하지만, 이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이날 당회의에서 “9일 국회 본회의까지 공수처법, 국가정보원법, 경찰청법 등 권력기관 개혁 3법을 반드시 처리해 국민의 명령을 이행하겠다. 제가 책임지고 입법하겠다”며 “어떤 집요한 저항에도, 불의한 시도에도 굽히지 않겠다”고 했다. 문 대통령이 공수처 필요성을 강조하자 이 대표가 총대를 메는 모양새였다.
야당에선 “문 대통령이 추·윤 사태를 사과하면서도 공수처를 밀어붙이겠다고 이중 플레이를 하고 있다”며 “권력기관을 정치적으로 좌지우지하고 있는 장본인이 문 대통령과 여당 아니냐”고 비판했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기자들과 만나 문 대통령이 공수처 설치법 처리 등을 요구한 것을 두고 “대통령의 돌격 명령”이라며 “온갖 기구를 만든다고 정권 잘못이 감춰질 것 같냐. 국민이 전부 개, 돼지이고 바보냐”고 했다. 유승민 전 의원은 페이스북에 “문 대통령이 검찰총장을 내쫓으려는 혼란상을 두고 ‘민주주의와 개혁을 위한 마지막 진통’이라고 했다”며 “유체 이탈도 이 정도면 심각한 중증의 환각 상태”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