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이 (북한에 의한 폭침이 아니라) ‘좌초’였다면 누구 하나 양심 선언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겠나. 수십년 전 학교 폭력도 논란이 되는 시대인데 비밀이 있을 수가 없다.”
2010년 천안함 폭침 사건 당시 함장이었던 최원일(53·해사 45기) 예비역 해군 대령은 지난 19일 본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지난달 28일 전역한 그는 그동안 언론과의 인터뷰를 극구 사양해왔지만 “이제 할 말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는 “참고 견디면 역사가 나중에 진실을 밝혀줄 것이라고 하는데 나는 죽고 난 뒤가 아니라 살아있을 때 명예를 회복하고 싶다”고도 했다.
-폭침 당시 상황은 어떠했나.
“승조원들이 소화기로 함장실 문을 부수고 나를 소화 호스에 매달아 꺼냈다. 갑판으로 나와보니 피를 흘리는 이들도 있었다. 모 상사가 ‘함장님, 함미가 없습니다’라고 울며 소리치더라. 부함장에게 인원 파악을 지시하니 숫자가 58에서 멈췄다. 천안함 승조원은 104명인데 58명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포술장이 상황실에 ‘좌초’라고 보고했었다.
“당직사관, 작전관, 부함장 등 장교들 모두 ‘어뢰 같다’고 입을 모았다. 나도 분명히 수중 무기라고 생각했고, 백령도 기지국에 어뢰라고 얘기했던 것이 녹음돼 언론에 보도됐다. 포술장 보고가 나중에 음모론자들의 빌미가 됐는데 ‘왜 그랬냐’고 물어보니 ‘침몰’이라는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다고 하더라. 너무 당황한 나머지 빨리 구조해달라는 말이 입으로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상급 부대들의 반응은 어땠나.
“처음엔 2함대 상황실에서조차 ‘장난치지 말라’고 했다. 상식적으로 전시도 아니고 평시에 이런 일이 있을 수는 없는 거니까. 나를 포함해 전역한 사람이 34명이다. 좌초였다면 누구 하나 양심 선언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겠나.”
-’결국 경계 실패 아니냐'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우리가 잠을 잤거나 근무에 태만했다면 모르겠는데 그런 부분이 없었다. 몇 번을 복기해봤지만 당시 배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은 다 한 것 같다. 승조원들은 이함(離艦)할 때도 이병 먼저, 아픈 사람 먼저 옮긴 다음에야 자신들이 내리더라. 천안함 폭침은 정보의 실패고, 작전의 실패고, 정부 정책의 실패였다.”
- 사건 당시 아쉬웠던 점들은.
“처음 겪는 일이라 그랬겠지만 구조에 대한 정확한 절차도 없었다. 생존자 58명이 환자복을 입은 채 기자회견을 했는데 돌이켜보면 군이 장병들을 ‘패잔병’으로 만든 것이다. 공황 상태에 있는 이들을 돌봐주지는 못할망정 카메라 수백 대 앞에 그대로 노출시켰다. 나만 군복을 입혔는데 책임질 만한 희생양이 필요했던 것 같다. 정치권도 당시 지방선거를 앞두고 여당은 여당대로, 야당은 야당대로 우리를 이용했다고 본다.”
- 천안함 생존 장병들에 대한 관심과 대우도 미흡했다.
“군에서조차 천안함 출신이 배를 타면 ‘재수없다’ ‘가까이 가지 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생존 장병 상이(傷痍)로 국가유공자 인정을 받은 건 34명 중 12명뿐이다. 진급에서 불이익을 받을까 정신과 진료도 받지 못했는데 군에서는 병원 진료 기록이 없으니 유공자 신청이 불가능하다고 하더라.”
- 2018년 ‘천안함 폭침 주범’ 김영철이 방남해 국빈급 대우를 받았다.
“당시 합참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때 나는 항의의 표시로 전역을 결심했다. 그런데 동기 한 명이 ‘이 또한 지나갈 테니 섣불리 판단하지 말라’고 말리더라. 술을 참 많이 먹었고, 나쁜 생각도 들었다.”
- 생존 장병들끼리 만나면 어떤 얘기를 하나.
“생존 장병들은 작은 일에도 쉽게 주눅이 든다. 그럴 때마다 나는 ‘너희는 패잔병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불의의 일격을 당했는데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고 패잔병으로 남는다는 건 용납이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