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마지막 괴물’ ,’막후의 쇼군(최고 실력자)’으로 불리며 일본 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 온 와타나베 쓰네오(渡邊恒雄·98) 요미우리신문 대표 겸 주필이 74년간의 기자 생활을 마감했다. 19일 오전 2시 폐렴으로 타계하면서다.

와타나베 주필은 지난달 말까지도 정기적으로 출근, 임원 회의에 참석했으나 이달 들어 갑자기 입원했다. 요미우리는 그가 “숨지기 며칠 전에도 (병상에서) 사설을 점검하면서 마지막까지 주필로 집무했다”고 했다. 그의 부고에는 “평생 기자로 일관했다”는 제목이 달렸다.

2020년 NHK와 인터뷰 중인 와타나베 쓰네오 요미우리신문 대표 겸 주필. /NHK

와타나베는 NHK가 2020년 그의 일생을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와타나베의 주장과 행동이 헤이세이(平成·아키히토 천황 재임시기 1989~2019) 시대에 큰 영향을 줬다”고 평가할 정도로 막후에서 일본 사회를 움직이는 거물로 평가돼 왔다. 일본 정계에서 ‘나베쓰네’라는 약칭으로 불리는 상징적 존재였다.

와타나베는 하나의 잣대로 평가하기 어려운 복합적 인물이다. 도쿄대 시절에는 공산당 지부 책임자였지만, 개인보다 조직을 우선시하는 것에 반발해 전향했다. 1950년 요미우리에 입사 후 워싱턴지국장, 정치부장, 논설위원장으로 승승장구했다.

1991년 사장이 되자 일본 사회 우경화에 맞춰 보수적 색채가 강한 지면과 공격적 경영으로 신문 부수를 늘려왔다. 그의 사장 재임 중 요미우리는 1994년에 최초로 1000만부를 돌파했다. 2001년 1월에는 1031만 91부 발행 기록을 세웠다. 1996년부터 약 8년 동안 프로야구 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 구단주로 활동하면서 스포츠 분야로도 영향력을 넓혔다.

그는 일제 군국주의에 비판적이었다. 요미우리는 2005년부터 1년간 ‘검증(檢證) 전쟁 책임’이라는 기획물을 연재했는데, “군국주의자들이 수백만 명을 죽여 일본을 폐허로 만들었다. 젊은이들에게 전쟁 책임을 알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라고 회고했다. 태평양 전쟁 A급 전범을 모시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에 대해선 “역사도 철학도 모르고, 공부도 하지 않으며 교양도 없다”고 맹비난했다. 하지만, 그는 1994년 자위력 유지와 환경권 신설, 헌법재판소 창설 등을 명기한 헌법 개정 시안을 만들어 개헌을 주장했다.

그는 일본 정계의 유력 정치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총리와 내각 인선 및 주요 정책에 개입해왔다. 요미우리가 19일 “(와타나베가) 나카소네 야스히로, 아베 신조, 기시다 후미오 등 역대 총리들과 친분이 두터워 정치권은 물론 각 방면에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고 보도할 정도다.

그는 특히 존 F 케네디가 미 대통령이 된 과정을 연구하며 나카소네 총리 만들기에 앞장섰다. 그의 묘비에 새겨질 문구는 나카소네가 써 줄 정도로 평생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아베 신조가 2012년부터 8년간 총리로 집권할 때는 ‘언제든 총리와 통화가 가능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의 와타나베 쓰네오 주필이 2020년 NHK 인터뷰에서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고 있다. 와타나베 주필은 한일 국교 정상화와 관련된 김종필·오히라 메모에 대해 "서울 방문 당시 김종필로부터 정보를 얻었다"고 말했다. /NHK

와타나베는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정언(政言) 유착의 대표적 기자이나 그의 활약은 독보적이다. 특히 기자 신분으로 1960년대 한일 수교 과정에서 주목할만한 역할을 했다. 와타나베는 당시 차기 총리로 거론되던 자민당의 거물 오노 반보쿠(大野伴睦) 부총재의 양아들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그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오노는 한일 국교 정상화에 소극적이었는데, 와타나베가 그를 설득했다. 그는 NHK 다큐멘터리에서 “오노와 김종필(당시 중앙정보부장)을 만나게 해줬더니 얘기가 잘 통해서 서로 좋아하게 됐다. 그래서 오노가 방한 결단을 내렸다”고 했다. 오노는 1962년 11월 방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한일 국교 정상화의 기틀을 놓았다.

와타나베가 한일 간 역사적인 메모를 입수한 것은 1962년 서울 방문 때였다. “오히라-김종필 합의 문서는 김종필로부터 정보를 얻었다. 무상 원조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민간 1억달러라고 쓰인 문서를 그가 보여줬다. 3 · 2 · 1…. 배상 금액이 이렇게 적혀 있었다.” 요미우리는 1962년 12월 이를 1면 톱기사로 보도했다.

와타나베는 자민당 거물의 방한을 성사시키고 이를 1면 톱 특종 기사로 쓴 데 이어 ‘JP-오히라’ 메모를 다시 단독 보도해 한일 양국을 모두 흔들어 놓았다. 김종필에 대해선 “두뇌가 우수했다. 인격도 좋고…. 재팬(일본) 콤플렉스도 없었다”고 평가했다.

일본 사회에는 그의 지나친 권력 지향성을 지적하는 이가 적지 않다. 요미우리 내에서 자신을 반대하는 이들을 차례로 제거하면서 ‘와타나베 왕국’을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일본에서 요미우리는 디지털화에 뒤처진 신문으로 통하는 데 그 배경으로 ‘페이퍼 신문’에 집착하는 와타나베를 지적하기도 한다.

‘전횡(專橫)의 카리스마 와타나베 쓰네오’라는 책을 출간한 저널리스트 오시타 에이지(大下英治)는 그가 사내 권력 투쟁을 일삼으며 대표 자리에 오른 후 ‘종신 독재자’가 됐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