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외교부·민주당 출입 기자·한나라당 취재반장·외교안보팀장·워싱턴-도쿄 특파원·국제부장·논설위원과 TV조선 정치부장으로 정치·외교·안보 분야를 26년간 취재해왔습니다. 주요 사안의 막전막후에서 벌어진 일을 전해드립니다.]

트럼프 2기 미국 행정부의 주한 미 대사로 한국계 미셸 박 스틸(70·한국명 박은주) 전 연방 하원 의원이 거론되면서 제2의 여성 미국 대사가 부임할지 주목됩니다. 한국계 여성 하원 의원으로 캘리포니아주에서 재선을 한 그가 부임하면 캐슬린 스티븐스 전 대사에 이어 두 번째 여성 미국 대사가 되는 기록을 세우게 됩니다.

1970년대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과 인연을 맺은 스티븐스는 2008년 8월 조지 W 부시 행정부 말기에 부임,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출범한 후에도 2011년까지 3년간 재임했습니다. 그는 1953년 한미동맹이 맺어진 후 부임한 정무 위주의 권위적인 남성 대사들과는 달리 한국 사회에 뛰어 들어 일반인들을 자주 만나는 공공외교 영역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런데 스티븐스는 당시 미 상원 인준에 어려움을 겪고, 낙마 위기에 몰려 부임하지 못할 뻔한 일이 있었습니다.

어렵게 미 상원 인준을 통과한 캐슬린 스티븐스(왼쪽) 주한 미 대사가 2008년 8월 8일 콘돌리자 라이스(오른쪽) 국무장관 앞에서 취임 선서를 하고 있다. 한국 이름이 ‘심은경’인 스티븐스 대사는 1975년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에 온 지 33년 만에 한국에 대사로 부임했다. 가운데는 스티븐스 대사의 아들 제임스./연합뉴스

◇ “평화봉사단 출신 여성 외교관이 대사된다”

2008년 1월 워싱턴 특파원 시절 일입니다. 스티븐 보즈워스 주한 미 대사 후임으로 1970년대 미국의 평화봉사단(Peace Corps) 단원으로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쳤던 여성 외교관이 거론되고 있다는 사실이 포착됐습니다. 취재를 해 보니 국무부를 취재할 때 알게 된 캐슬린 스티븐스 전 국무부 동아태 담당 수석 부차관보였습니다. 그는 2007년까지 수석 부차관보로 일하다가 국무부의 동아태 담당 선임고문으로 활동하며 주한 미 대사 출신의 크리스토퍼 힐 동아태 차관보를 보좌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주한 미 대사로 지명된 데는 같은 평화봉사단 출신의 힐 차관보의 역할이 컸습니다. 두 사람은 1980년대에 주한미대사관에서 각각 정무팀장(스티븐스), 경제팀장(힐)으로 활동하며 깊은 신뢰를 쌓아왔습니다.

당시 주미 대사관과 한국 특파원들은 스티븐스 지명을 모두 환영했습니다. 스티븐스가 한국과 각별한 인연이 있는 데다 여성 대사의 부임이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스티븐스는 평화봉사단에서 파견돼 1975년부터 2년 동안 한국명 ‘심은경’으로 충남 예산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습니다. 이어 1977년 주한 미 대사관에서 외교관 시험을 치른 후 1978년에 외교관이 됐습니다. 그는 1984년부터 주한 미 대사관 정무팀장으로 근무하면서 한국의 민주화 과정을 지켜봤습니다. 이 과정에서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정·관계 인사들과 친분을 쌓았습니다. 나중에 이명박 정부의 외교부 장관이 되는 김성환(외시 10회)씨를 비롯, 많은 한국 외교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었습니다. 스티븐스는 한국인과 결혼, 아들을 한 명 낳은 후 이혼했습니다.

그는 2005년 6월 수석 부차관보에 취임 후, 북핵 문제 및 6자회담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2006년 3월 북한 계좌가 동결된 마카오 은행 방코델타아시아(BDA)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한 리근 북한 외무성 미주국장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2007년 1월엔 서울을 방문, 외교부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방안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이같은 경력 때문에 미 상원이 ‘스티븐스 대사’에 대해 반대하지 않을 것을 보여 이르면 2008년 6월 부임할 것으로 예상됐습니다.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 대사가 1970년대 평화봉사단원 시절 충남 예산중학교 학생들과 함께 환하게 웃고 있다./연합뉴스

◇축제 분위기 같았던 인준 청문회

2008년 4월 9일 미 상원 외교위원회의 스티븐스 인준 청문회는 여러 면에서 이례적이었습니다. 주미대사관 관계자들과 함께 현장을 지켜보니, 마치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우선 민주당의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 의원이 스티븐스 지명자와 나란히 앉아 있는 게 특이했습니다. 당시 뇌종양으로 투병중인 케네디 상원 의원은 “캐슬린은 여성과 평화봉사단원으로는 처음으로 주한 미 대사에 지명됐으며 한국말을 하는 최초의 미국대사로 업무에 손색이 없다”고 칭찬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형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이 만든 평화봉사단을 오랫동안 지지해왔습니다.

청문회를 주관한 바바라 박서 상원 외교위 동아태 소위원장은 스티븐스가 한국인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제임스 군과 그의 상관이었던 제임스 릴리 전 주한 미 대사를 일일이 일으켜 소개했습니다.

알래스카 출신의 리자 머코스키 의원이 “알래스카에 한국 총영사관이 만들어지도록 해 달라”고 하자 박서 의원도 “내 지역구인 캘리포니아에도 60만 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달라”고 말해 웃음이 터지기도 했습니다.

스티븐스는 모두 발언에서 “한국이 경제·정치적으로 놀랄만하게 성장하는 시기에 한국에 있었다”며 “한국의 미래와 한미 관계에 대해서 낙관적”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한국은 매일 같이 긴급뉴스(Breaking news)가 나오는 역동적인 나라”라며 자신이 청문회에 제출하는 서류를 만든 후에 발생한 미북협상, 한국의 여성 우주인 이소연씨 탄생을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북한 인권에 대해선 “내겐 북한의 인권 상황을 제고해야 할 특별한 의무가 있다. 한국의 새 정부와 협력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 한국계 보좌관둔 브라운백 의원이 강하게 반대

그런데, 상원 외교위원회 청문회가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끝난 후 4월 말부터 좋지 않은 얘기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한반도 문제에 관심이 많은 공화당의 샘 브라운백 상원의원이 스티븐스의 임명을 강하게 반대한다는 겁니다. 스티븐스 인준을 낙관하고 있던 주미 대사관 관계자들도 긴장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설마, 그럴 리가 있나...” 반신반의 속에 미 국무부를 취재해 보니 사실이었습니다.

2008년 미 공화당의 샘 브라운백 상원의원이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미대사' 인준안을 강하게 반대했다. 브라운백 의원은 당시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가 북한에 대해 지나치게 유화적이라며 대북 정책 수정을 요구하며 스티븐스 인준 반대에 나섰다. /연합뉴스

브라운백 의원은 백악관과 국무부가 대북(對北) 인권 문제를 강하게 제기할 것을 요구하며 스티븐스 인준 반대 입장을 밝혔습니다. 주한 미 대사의 직무와 북한 인권 문제를 연계시키는 그의 논리에 대해 국무부는 반발했지만 일부 동료 의원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동안 부시 행정부의 국무부가 탈북자, 북한 인권 문제를 개선시키지 못한 채 북핵 6자회담을 비롯한 북한과의 협상에서 유화(柔和)적 자세를 취했다는 비판이 컸습니다.

더 깊이 들여다보면, 브라운백 의원이 스티븐스를 추천한 힐 차관보를 견제하기 위해 제동을 걸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힐 차관보는 워싱턴 DC에서 그의 이름과 김정일의 이름을 합쳐서 ‘김정힐’로 불릴 정도로 비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힐 차관보를 못마땅하게 여겨 온 브라운백 의원이 스티븐스 인준을 거부하는 방법으로 대북정책 수정을 요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곤란해진 스티븐스가 브라운백 의원을 찾아갔을 때 1시간 30분을 기다리게 한 일도 있었습니다.

브라운백 의원과 그 주변을 취재하면서 그 배경에 한국계의 W 보좌관이 있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취재를 해 보니, W 보좌관은 변호사 출신으로 북한 체제를 민주화시켜야 한다는 신념을 굳게 갖고 있었습니다. W 보좌관이 브라운백 의원의 스티븐스 인준 반대 결정에 미친 영향이 적지 않았습니다. 당시 워싱턴 DC의 유력 소식통을 통해 취재한 바에 따르면, W 보좌관은 “왜 일 잘하는 버시바우 대사를 바꾸려고 하는 지 알 수 없다. 힐 차관보는 문제가 많은 사람이다. 힐 차관보는 북한 인권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데, 스티븐스 지명자를 보내더라도 단단히 교육시켜서 보내야 한다”고 했다고 합니다.

◇미 상원, 대사 임명에 만장일치 전통

당시만 해도 미국의 상원 시스템은 관료의 대사 임명에서는 만장일치를 추구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브라운백 의원이 스티븐스의 인준에 강하게 제동을 걸어 상원 전체 회의를 통과하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5월이 지나면서 안 좋은 얘기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외교안보 전문가는 “캐슬린 스티븐스는 사실상 끝났다. 힐 차관보의 가장 큰 목표는 북핵 6자회담을 잘 이끌어가는 것이다. 지금 스티븐스에게 신경 쓸 여력이 없다. 그 문제로 상원의 화를 자초하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조선일보 2008년 6월 7일자 특파원 칼럼 <美 외교관 '심은경'씨의 운명>. "주한 미대사 내정자 인준 지연이 미국 정치권과 행정부의 힘 겨루기 속에 방치되는 것은 한국이 중요하지 않다는 잘못된 인식을 줄 수도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미 공화당 소속으로 한반도 사안에 대해 밝은 인사도 “브라운백 상원 의원이 저렇게 나오면 스티븐스 인준은 어렵다. 국무부가 그의 요구를 들어주거나, 백악관이 브라운백 의원의 지역구 민원을 하나 들어주기 전에는 인준 통과가 어렵다”고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당시 저는 이 문제가 정치화되는 것이 한미 관계에 좋지 않다고 판단, 칼럼을 써서 보냈습니다.

“한국에 특명전권대사로 누구를 보내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미국 정부와 의회의 권한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주한 미 대사 내정자 인준 지연이 미국 정치권과 행정부의 힘겨루기 속에 방치되는 것은 한국이 중요하지 않다는 잘못된 인식을 줄 수도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주한 미 대사의 위상이 예전과 같지 않지만 한국에선 여전히 가장 중요한 외교 사절인 것은 틀림없다. 2002년 ‘효순·미선양 사건’이 발생했을 때 당시 주한 미 대사가 그 심각성을 좀 더 일찍 파악했더라면 한미 간의 갈등은 최소화됐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다음 달 조지 부시(Bush) 대통령이 방한하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 문제는 가부(可否) 간에 어떤 식으로든 조속한 결정이 내려져야 할 것 같다.”

◇ 스티븐스의 기사회생

브라운백 의원이 스티븐스의 대사 임명에 강하게 제동을 걸어, 3개월 넘게 상원 전체 회의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을 때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뇌종양 투병 중인 에드워드 케네디 미 민주당 상원의원이 민주당 전당대회 첫날인 25일 저녁 콜로라도주 덴버시의 펩시센터에서 버락 오바마 후보를 지지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스티븐스가 낙마 위기에 처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고령(高齡)의 상원의원 두 명이 나섰습니다. 먼저 외교위원회 인준 청문회장에 스티븐스와 나란히 앉아서 그를 도와줬던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이 브라운백 의원 설득에 나섰습니다. 뇌종양으로 거동도 힘든 상황이었지만, 스티븐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케네디 의원은 1년 뒤인 2009년 8월 사망했습니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존 워너 상원의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는 김일성의 6·25 동족살해(同族殺害) 남침 당시 1951년부터 1년간 미 해병대 장교로 한국에서 싸운 경력이 있습니다. 한국전 참전 용사인 그는 상원 군사위원회에서 열린 북핵 청문회에서 “상원이 8월 휴회에 들어가기에 앞서 그동안 유보돼 온 스티븐스 주한 미 대사 지명자의 인준이 매듭지어지길 희망한다”고 제안했습니다. 아시아 지역을 방문할 때 스티븐스가 수행했던 그는 “캐슬린은 주한 미 대사라는 중책을 맡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탁월한 능력을 가졌다”는 공개 발언으로 브라운백 의원을 ‘압박’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스티븐스는 기사회생(起死回生)했습니다. 스티븐스 임명을 반대해 온 브라운백 의원은 2008년 7월 31일 반대 입장을 철회한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하루 뒤인 8월 1일 상원은 전체회의를 통해 ‘스티븐스 주한 미 대사’를 확정했습니다. 브라운백 의원은 성명에서 “크리스토퍼 힐(Hill)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가 청문회에서 북한 인권 문제를 6자회담에서 다루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스티븐스 주한 미 대사 지명자에 대한 인준 반대를 철회하기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따라 어렵게 미 상원 인준을 통과한 스티븐스는 2008년 8월 8일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 앞에서 취임 선서를 한 후, 서울에 부임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