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외교부·민주당 출입 기자, 한나라당 취재반장, 외교안보팀장, 워싱턴·도쿄 특파원, 국제부장, 논설위원과 TV조선 정치부장으로 정치·외교·안보 분야를 26년간 취재해 왔습니다. 주요 사안의 막전막후에서 벌어진 일을 전해드립니다.]
<지난 회 “미국만 다녀오면 한미 동맹 깨버리고 싶다”에서 계속됩니다.>
2011년 시작된 한미 미사일 지침 개정 협상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2012년 중반이 됐습니다. 이때 조선일보 정치부에 미국이 우리나라의 탄도미사일 사거리를 2001년 개정한 300㎞에서 550㎞로 늘릴 수 있다는 입장을 시사한 것이 포착됐습니다. 사거리가 늘어날 때 탄두 중량을 줄이는 ‘트레이드 오프’도 적용하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는 겁니다.
미국이 1년 넘게 완강한 모습을 보이다가 입장을 바꾼 것은 긍정적이었지만, 우리나라가 정말 필요로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주변 국가인 중국·러시아·일본과 북한 모두 사실상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능력을 가진 상황에서 250㎞의 사거리 연장을 시혜처럼 받아들여선 안 된다는 공감대가 조선일보 편집국에 형성됐습니다. 당시 한국의 많은 전문가는 유사시 우리가 남해안뿐만 아니라 제주도에서 북한 전역을 대상으로 하는 미사일을 쏘기 위해선 사거리가 최소한 1000㎞ 이상이 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한미 양국이 19개월째 협상 중인 미사일 사거리·탄두 중량 협상에서 가장 바람직한 결과는 이를 무효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회에서 밝힌 대로 1979년 맺어진 후, 33년간 유지돼 온 ‘한미 미사일 지침’은 달라진 한국의 위상에 걸맞지 않다는 지적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미사일 지침 무효화를 이끌어낼 수 없다면 시효를 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견해도 나왔습니다.
◇ 조선일보 ‘경제 톱10 대한민국 안보 현안 족쇄 풀자’ 기획
이런 분위기 속에 조선일보는 한미 미사일 지침 문제를 정면으로 파고드는 대형 기획 보도를 시작했습니다. 2012년 7월 16일 월요일 자 1면 톱에 [경제 톱10 대한민국 안보 현안 족쇄 풀자]라는 제목의 기사가 게재됐습니다. 첫 회에 “한미 미사일 지침 효력 끝내야 한다”는 제목이 달렸습니다. 부제로는 ‘미사일 사거리 연장 협상하는 것 자체가 부당’하다고 했습니다.
1면 외에도 4~5면 전면이 할애됐는데, ‘동북아 안보 상황 급변하는데 사거리 250㎞ 놓고 줄다리기’, ‘극비 개발 미사일 제원까지 알려줘야... 명백한 주권 훼손’ 등의 기사가 강한 톤으로 실렸습니다. 이 기획 보도에서 1999년부터 2001년까지 국방부 군비통제관으로 한미 미사일 지침 개정 협상에 핵심 멤버로 참여했던 김국헌 예비역 육군 소장은 “(미국이 우리 탄도미사일 사거리를 계속 제한하려는 것은) 프로메테우스가 불 특허권을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이 기획을 지시하고, 총괄했던 양상훈 편집국장(현 조선일보 주필)은 ‘족쇄’가 들어가는 제목을 직접 제안해 1면부터 명기하도록 했습니다.
조선일보의 ‘미국의 족쇄 풀자’ 는 기획은 이날부터 5일 연속 1면, 4~5면에 걸쳐 나가는 대형 기획이었습니다. 당시 한미 간에 논의되던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후 5년이 지나면 미사일 지침을 아예 소멸시키자는 제언도 했습니다.
한미 미사일 지침 개정 협상에서 미국이 크게 성의를 보이지 않고 있을 때 시작된 이 기획은 한국과 미국의 정부 안팎에서 큰 화제가 됐습니다. 특히 한미 동맹을 중시하는 조선일보가 ‘족쇄’라는 표현을 써가며 기획을 했다는 것에 주목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이에 대해 주한 미 대사관 관계자들은 불만을 나타냈습니다. 족쇄라는 어감이 지나치게 강하고 현실을 오도한다는 겁니다. 주한 미 대사관의 한 관계자는 제게 “족쇄라는 말이 너무 과하다. 이런 표현을 꼭 써야 하느냐. 삭제할 수 없느냐”며 항의하기도 했습니다.
‘족쇄’ 기획에 대해 놀라기는 이명박 정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정부 관계자들은 조선일보의 기획이 협상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면서도 표현이 너무 강해서 오히려 역효과를 낼지 모른다고 우려했습니다. 한미 미사일 지침이 국민의 눈높이에 맞게 개정되지 못할 경우의 후폭풍을 우려하기도 했습니다. 정치부 소속으로 기획에 참여한 전현석 기자(현 조선일보 자회사 ‘스튜디오 광화문’ 대표)가 쓴 ‘기자수첩’은 당시 정부 분위기를 잘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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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기자의 하루 일과는 정부 관계자들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는 것으로 시작됐다. 이들은 대뜸 지난 16일 자부터 본지에 연재되고 있는 ‘경제 톱10 대한민국 안보 현안 족쇄 풀자’ 기획 의도, 앞으로 다루게 될 주제에 대해 묻곤 한다. 그런 다음 “언제까지 이 시리즈를 계속할 거냐”는 질문을 빠뜨리지 않는다. 이른 아침 시간,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이들의 목소리에서 당혹스러워하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 이유를 짐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미 미사일 지침 속에 담겨 있는 우리 안보의 발목을 잡고 있는 크고 작은 족쇄들, 주권 침해 요소, 불평등성 등을 지적하는 본지의 연재물이 불편하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한미 미사일 지침을 다뤄온 청와대와 국방부, 외교부 관계자들에게 이 문제는 국민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불편한 진실’이었을지 모른다. (중략) 나흘 가까이 매일 아침 정부 관계자들의 전화를 받으면서 우리 정부가 급변하는 안보 정세를 헤쳐나갈 유연함과 전략적 사고 능력을 갖췄는지 새삼 의문을 갖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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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중국도 한국 미사일 사거리 연장에 반대
한미 미사일 지침 개정 협상의 또 다른 변수는 일본과 중국이었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일본의 민주당 정권과 관계가 좋지 못했습니다. 일본은 특히 2012년 8월 이명박 대통령 독도 방문 후, ‘반(反) 이명박’ 노선을 분명히 하고 있었습니다.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내각은 한국의 미사일 능력이 커지면 일본의 남서(南西) 지역이 사정권에 들어갈 수 있다며 지침 개정에 대한 반대 입장을 정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우리나라가 미사일 사거리를 300㎞에서 800㎞ 이상으로 대폭 늘릴 경우 일본 열도의 상당 부분이 한국 미사일의 사정권 내에 들어간다며 부정적 입장을 취한 겁니다. 일본은 이런 입장을 미국에 전달했는데, 저는 이를 취재해 2012년 9월 5일 자 1면에 보도했습니다.
일본의 탄도미사일 기술 수준은 한반도 전역을 사정권으로 할 정도며 ICBM으로 전환할 수 있는 3단 고체 로켓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한국의 미사일 능력이 크게 강화될 경우 독자적인 대북 행동 등에 나설 수도 있다는 논리로 미국을 설득하려고 했습니다.
중국도 한국의 탄도미사일 능력 증강에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중국은 한국이 사거리를 1000㎞ 가까이 늘릴 경우, 베이징이 사정권에 들어간다는 점에서 거부감을 보였습니다. 중국 정부의 량광례(梁光烈) 국방부장을 비롯한 군부 지도부가 한국의 미사일 능력 증강을 중국에 대한 한미 동맹의 포위 전략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렸습니다. 중국 공산당은 한국이 미사일 사거리를 800㎞ 이상으로 늘릴 경우, 북한을 자극해 동북아에 긴장이 고조되는 사태를 초래할 것이라는 논리를 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중국의 DF-21C는 사거리가 2500㎞이며 DF-31A는 1만㎞ 이상을 날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중국의 반대는 논리적이지 못했습니다.
미국은 2011년 1월 개정 협상이 시작될 때부터 일본·중국의 우려와 반대를 내세워 사거리 300㎞·탄두 중량 500㎏의 현행 지침을 완전히 폐지하거나, 최소한 각각 1000㎞·1t 이상으로 늘려야 한다는 한국의 여론에 난색을 표명해 왔습니다.
◇오바마 한국 여론 보고받고 미 국방부 손 들어줘
조선일보의 ‘미국의 족쇄 풀자’는 기획 이후, 미사일 지침 개정 협상이 진척되기 시작했습니다. 2012년 9월 21개월째 협상 중이던 한미 양국은 우리나라의 미사일 사거리를 유사시 북한 전역을 사정권에 넣을 수 있는 800㎞가량으로 확대하고, 탄두 중량도 현행 500㎏보다 늘리는 데 의견 접근을 이룬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오바마 미 대통령은 2012년 3월 방한했을 때만 해도 기자회견에서 한국의 미사일 사거리 연장에 부정적인 발언을 했지만, 7월 본지 기획 보도 이후 입장을 바꾸었습니다. 당시 저의 취재에 따르면, 오바마는 7월 이후 “한국에서 사거리가 최소한 800㎞ 이상이 돼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한국이 바라는 대로 동의해 주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합니다. ‘비확산’을 주장하는 국무부가 아니라 한국 입장을 어느 정도 이해하려 했던 국방부의 손을 들어준 겁니다.
이에 따라 한미 양국은 2012년 10월 5일 제2차 미사일 지침 개정에 합의했습니다. 한미 양국은 “2001년 지침 개정 이후 약 10년간의 변화한 안보 환경을 반영하고 현재와 미래의 군사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도록 군사 전략과 무기 개발 융통성을 대폭 확대하는 차원”에서 개정됐다고 설명했습니다.
탄도미사일의 경우, 사거리를 300km에서 최대 800km로 연장하고, 탑재 중량은 사거리 800km 기준으로 500kg 미만으로 유지하되, 사거리를 줄이는 만큼 탄두 중량을 늘릴 수 있는 트레이드오프 개념이 적용됐습니다. 무인항공기(UAV)의 경우, 탑재 중량을 2500kg까지 확대했습니다. 순항미사일은 기존과 동일하게 사거리 300km 범위 이하에서는 탑재 중량 제한이 없고, 500kg 이하일 경우 사거리 무제한의 원칙이 적용됐습니다.
◇2021년 미사일 족쇄 42년 만에 완전 해제
2012년 미사일 지침 개정으로 한국의 미사일 주권이 신장된 것은 분명하나, 여전히 제약이 많았습니다. 이후 한국과 미국에 “과연 미사일 지침이 필요하냐”는 분위기가 확산됐습니다. 2017년 11월 문재인 정부에서 3차 개정을 통해 탄도미사일 최대 사거리를 800㎞로 제한하되 탄두 중량 제한을 완전히 없앴습니다. 이에 따라 세계 최대 규모의 탄두 중량을 가진 미사일 ‘현무-4’가 개발됐습니다. 현무-4는 사거리 800㎞일 때 2t, 사거리 300㎞일 때 4~5t 이상의 탄두 장착이 가능, 유사시 북한의 평양 중심부의 축구장 200개 면적을 초토화할 수 있습니다.
2020년 7월에는 4차 개정을 통해 우주발사체에 대한 고체연료 사용 제한이 철폐됐습니다. 이로써 고체연료 로켓 개발로 독자 정찰위성 및 GPS 위성 등을 띄울 수 있게 됐습니다.
2021년 5월 21일 문재인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워싱턴 DC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한미 미사일 지침을 완전히 무효화하기로 합의했습니다. 42년 만에 한미 미사일 지침이 사라짐으로써 우리나라는 중국·러시아까지 사정권에 둔 중거리 탄도미사일 개발이 가능해졌습니다. ‘최대 사거리 800㎞ 제한’이 사라지면서 사거리 2000~3000㎞의 중거리 미사일은 물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미국이 그동안 한반도 주변의 안보 상황 변화를 도외시한 채 낡은 개념의 한미 미사일 지침을 고수해왔다는 것이 명확해졌습니다.
미국은 6·25 때 대한민국을 구하고, 우리나라의 안보와 발전에 없어서는 안 될 동맹국이지만, 지정학적 인식 차이로 한반도 안보에 대해 판단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의 논리에 그대로 순응할 경우, 자칫 우리의 안보 역량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럴 때 2012년 미사일 지침 개정 협상 때 있었던 일은 냉철한 상황 판단 하에 국내 여론을 제대로 결집시키면 미국을 설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기존의 동맹 개념을 폐기하는 ‘트럼프 광풍’ 속에서도 분명한 목표와 이를 뒷받침하는 여론의 성벽(城壁)이 있다면, 거센 바람을 이겨낼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