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외교부·민주당 출입 기자, 한나라당 취재반장, 외교안보팀장, 워싱턴·도쿄 특파원, 국제부장, 논설위원과 TV조선 정치부장으로 정치·외교·안보 분야를 26년간 취재해 왔습니다. 주요 사안의 막전막후에서 벌어진 일을 전해드립니다.]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 파면 결정이 나기 얼마 전의 일입니다. 박 대통령은 직무 정지돼 청와대 내부의 관저에 머물렀고, 한광옥 비서실장과 수석 비서관들이 주요 현안이 있을 때마다 이곳을 방문했습니다.

국정원 측에서 청와대에 헌법재판소가 박 대통령 탄핵소추에 대해 기각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비밀리에 보고해 왔습니다. ‘찬성 5대, 반대 3′으로 기각돼 박 대통령이 직무에 복귀할 것이라고 알려온 겁니다. 청와대의 전직 고위 관계자는 “국정원의 고위 인사 A씨가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라며 ‘5대 3′으로 기각된다고 전해왔다”고 밝혔습니다.

연단에 선 박근혜 대통령이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5년 9월 28일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제70차 유엔총회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AP 뉴시스

청와대 비서실도 다른 채널을 통해 박 대통령 탄핵소추가 기각될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박 대통령 탄핵이 인용되려면 헌재 재판관 8명 중 6명 이상이 찬성해야 하는데, 3명 이상이 기각 의견을 내 탄핵은 무산된다고 확신했습니다. 이에 따라 박 대통령의 직무 복귀를 축하하기 위한 내부 행사를 미리 준비하기도 했습니다.(대형 케이크를 준비했다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 트럼프와의 정상회담으로 분위기 반전 기대

청와대는 박 대통령 탄핵소추가 기각돼 직무에 복귀하는 즉시 분위기를 쇄신하고 실추된 박 대통령의 이미지를 회복하는 방안을 논의했습니다. 여러 방안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박 대통령의 조기 해외 순방을 통해서 분위기를 반전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는 겁니다.

2016년 12월 9일 박 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되면서 연말에 열릴 예정이던 한중일 정상회의를 비롯한 정상 외교가 무산됐습니다. 2017년 1월 취임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등 중요한 외교 일정이 모두 보류됐습니다.

지금으로부터 8년 전, 1기 임기를 시작한 트럼프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은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트럼프 1기 때는 균형감을 가진 관료들에 둘러싸여 지금처럼 ‘트럼프 광풍’이 불지는 않았지만, 돌출적인 정책이 나올 가능성이 컸습니다. 자칫 한미 동맹이 훼손되고, 한미 통상에서도 피해를 입을 것이라는 우려가 적지 않았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한미 정상회담이 이뤄져야 하는데, 탄핵 사태로 실기하고 있다는 비판이 비등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4년 1월 21일 스위스 다보스의 한 호텔에서 열린 제44차 WEF(세계경제포럼)의 '한국의 밤'행사에서 연설하고 있다./연합뉴스

이같은 배경에서 청와대는 다른 무엇보다 한미 정상회담의 조속한 개최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박 대통령이 취임 후 해외 정상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아왔고, 해외 순방을 할 때마다 지지율이 오르곤 했던 경험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베테랑 외교관 차출, 외교비서관실 보강

청와대의 결정에 따라 김규현 국가안보실 2차장 겸 외교안보수석비서관이 관련 준비에 착수했습니다. 김 차장은 박 대통령이 탄핵된 상황에서도 외교비서관실을 보강하고 있었습니다. 아시아 국가에서 근무 중이던 유능한 외교관을 청와대로 불러 들였는데, 그에게 박 대통령 순방 관련 업무를 맡겼습니다. 김 차장이 외교부 간부들에게 직접 연락을 하기도 했습니다.

청와대에 들어갔다가 ‘박 대통령 탄핵 소추 기각’ 정보를 접한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외교부로 돌아와 일부 간부들에게 청와대 분위기를 알렸습니다. 그는 이들에게 탄핵 소추가 기각될 것에도 대비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이 즈음 저는 외교부의 한 관리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 외교관은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 탄핵이 안 될 것으로 판단한다는 데, 정말 그렇게 되느냐. 언론계는 어떻게 보고 있느냐”고 물어왔습니다.

◇ 실무진 “탄핵 상황에서 해외순방 준비는 무리”

청와대는 박 대통령이 복귀할 경우 트럼프 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조기에 하는 방안을 구상했습니다. 미국 방문 후, 다른 나라를 거쳐서 귀국하는 안도 거론됐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파면을 보도한 조선일보 2017년 3월 11일자 1면 기사

하지만 박 대통령이 탄핵 중인 상태에서 해외 순방 계획은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청와대와 외교부의 실무진은 박 대통령 탄핵이 인용될 가능성이 큰 상태에서 해외 순방을 준비하는 것은 무리라고 보았습니다. 또, 탄핵 기각을 전제로 미국을 비롯한 상대국과 교섭하는 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들 국가는 주한 대사관을 통해서 매일같이 관련 상황을 수집, 분석하고 있었는데 박 대통령의 직무 복귀에 대해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박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가 인용될 것이라는 전망이 더 높았기 때문에 논의가 구체적으로 진전되지 않았습니다.

2017년 3월 10일 청와대의 희망과는 달리 헌법재판소 재판관 8명 전원 일치로 박 대통령 파면 결정이 내려지면서 해외 순방 계획은 없던 일이 됐습니다. 박 대통령 해외순방 계획은 비밀리에 진행됐기 때문에 공식 기록으로 남지도 않았습니다.

당시 사정에 밝은 전 청와대 관계자는 “청와대가 헌재의 탄핵소추 심리 관련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했다. 박 대통령은 무죄이고, 조속히 직무에 복귀해야 한다는 집단 사고에 빠져 있다 보니 잘못 판단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렇다면 윤석열 대통령이 탄핵 소추된 지금 외교부는 어떻게 움직이고 있을까요? 외교부 대변인실은 8일 “현재 외교부가 검토하고 있는 정상 순방 계획은 없다”고 밝혔습니다. 외교부 관계자는 “헌재의 윤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 결정을 주시하며 일상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대통령실로부터 해외 순방을 준비하라는 지시를 받은 적도 없다”고 했습니다.

참고로, 윤 대통령의 계엄 선포에 적극 반대했다고 밝힌 조태열 외교부 장관은 윤 대통령의 탄핵이 기각돼 직무에 복귀하면, 즉시 사표를 내겠다는 입장을 주변에 시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