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대 주한미군 철수 위기와 제2의 6·25전쟁을 방불케하는 북한의 도발로 한반도 안보가 흔들리자 자주국방 정책과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로 난국 돌파를 시도했다. 그의 핵 프로젝트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소설에서도 그려졌듯 NPT 가입 압박, 캐나다 및 프랑스 기술 협력 차단 등 미국의 전방위적 봉쇄책으로 중단됐다. 그러나 그의 '핵 개발' 시도는 주한미군 철수 철회, 핵우산 제공을 이끌어내는 협상 카드로 활용됐고, 지금까지도 한국 핵개발 역량의 밑바탕이 되고 있다. 그는 비록 암살됐지만, 그의 '무궁화 '는 암살되지 않은 것이다. /조선일보 DB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대 주한미군 철수 위기와 제2의 6·25전쟁을 방불케하는 북한의 도발로 한반도 안보가 흔들리자 자주국방 정책과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로 난국 돌파를 시도했다. 그의 핵 프로젝트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소설에서도 그려졌듯 NPT 가입 압박, 캐나다 및 프랑스 기술 협력 차단 등 미국의 전방위적 봉쇄책으로 중단됐다. 그러나 그의 '핵 개발' 시도는 주한미군 철수 철회, 핵우산 제공을 이끌어내는 협상 카드로 활용됐고, 지금까지도 한국 핵개발 역량의 밑바탕이 되고 있다. 그는 비록 암살됐지만, 그의 '무궁화 '는 암살되지 않은 것이다. /조선일보 DB

“You don’t have the cards(넌 카드가 없잖아).”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지난달 28일 백악관을 찾은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한 말입니다. 2022년 러시아의 침략에 맞서 싸웠지만 자력으로 더는 버틸 수 없어 빼앗긴 영토를 되찾지도 못한 채 전쟁을 끝마쳐야 하는 우크라이나의 처지를 단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트럼프가 유별난 것 같지만 사실 과거 다른 미 대통령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1950년대 이승만 대통령,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젤렌스키보다 더한 수모를 겪으면서도 한미상호방위조약과 주한 미군 철군 철회를 끌어낸 역사를 알고 있습니다.

미국 문인 마크 트웨인은 말했습니다.

“History doesn’t repeat itself, but it often rhymes(역사는 반복하진 않지만, 운율은 맞추곤 한다).”

역사가 아주 똑같이 반복되진 않지만, 시(詩)의 운율처럼 닮은꼴로 반복된다는 뜻입니다. 젤렌스키가 특별히 트럼프에 당한 것 같지만, 역사를 되돌아보면 수많은 약소국의 지도자들이 강대국이 강요하는 논리에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런 역사의 라임을 통해 우리는 힘이 없으면 안 된다, 힘을 확보해 놓고 있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카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정치인의 표현대로 ‘글로벌 호구’가 될 수 있습니다.

1976년 5월 31일 포철 제2고로 화입식에서 직접 불을 댕기는 박정희 대통령과 박태준(둘째 줄 가운데) 사장. 자본도 기술도 없이 추진한 제철사업이었지만 25년 후 포철은 조강 규모 2800만t의 세계 2위 철강회사로 성장했다. 제철업은 한국의 '카드'가 됐다. /조선일보 DB

‘김종필 증언록’에 이런 대목이 나오더라고요.

“미국은 가치 없는 나라는 버린다. 스스로 가치 있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1970년대 핵 기술, 방위산업,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면서 한국 전체를 거대한 병기창으로 변모시켰다. 미국은 월남 같은 농업 국가는 버려도 한국 같은 공업 국가는 버리지 않는다. 철강, 석유화학, 조선, 전자, 화학의 나라인 한국이 소련이나 중국의 수중에 들어간다고 생각해 보라. 미국은 전략적으로 치명적인 손실을 보게 된다.”

김정렴 비서실장의 책 ‘아! 박정희’에선 이런 대목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방위산업을 가진 중화학공업 국가는 반드시 수호한다는 것이 역대 미국 정부와 미 의회 지도자들의 확고한 내부적 결의와 합의이며, 앞으로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중화학공업 발전과 방위산업 육성이 국군 전력 강화 못지않게 안보상 매우 중요하다.”

지금이야 ‘철통 같은’ ‘빛 샐 틈 없는’ 한미 동맹은 상수같이 여깁니다만, 시계를 조금만 거꾸로 돌려보면 그렇지 못했습니다. 과거 지도자들이 얼마나 절박하게 ‘카드’를 확보해 놓으려 애썼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카드’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고, 팽 당할 수밖에 없다는 ‘레알 폴리티크(Realpolitik)’의 실상을 누구보다 잘 알고, 행동했습니다.

1994년 1월 모스크바에서 당시 빌 클린턴(왼쪽부터) 미 대통령, 옐친 러시아 대통령, 크라우추크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의 NPT 가입에 합의했다고 발표하며 손을 맞잡고 있다. 그해 12월 5일 부다페스트에서 우크라이나는 카자흐스탄, 벨라루스와 함께 공식적으로 3국의 NPT 가입, 핵포기, 안전 보장 등을 골자로 한 부다페스트 안전 보장 각서에 서명했다. /백악관

2025년 우크라이나의 비참한 처지는 1994년 부다페스트 각서의 허망함을 보여줍니다. 우크라이나는 당시 빌 클린턴 미 대통령과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 등의 권유로 핵무기를 전량 반납했습니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미국·소련에 이은 세계 3위의 핵 강국이었습니다. 중거리 핵미사일과 ICBM(대륙간탄도미사일)에 탑재 가능한 전략 핵탄두 수가 1700개 이상이었고, 중·단거리 미사일과 전략 폭격기용 전술 핵무기도 최소 2000개 이상 보유했었습니다.

그런데 ‘핵 없는 평화 국가로 거듭난다면 우리가 경제적으로 챙겨주고 안보도 책임주겠다’는 허울 좋은 각서 한 장에 핵탄두를 모두 반납하며 핵보유국의 지위를 내려놓았습니다.

국제사회는 이런 우크라이나에 찬사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한 때의 영광이었습니다. 옐친이 영원히 러시아의 지도자일 순 없는 노릇입니다. 길어봤자 8년 임기인 빌 클린턴의 미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 나라의 안전을 책임져주겠다고 약속한 다른 나라의 대통령이 어떤 인물로 뒤바뀔지, 그가 어떤 정책을 펼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누구도, 어느 나라도 내 나라를 끝까지 책임져주지 않습니다. 내 나라는 내가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넌 카드가 없잖아’라는 트럼프 말을 들었을 때 젤렌스키는 부다페스트 각서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현지 시각 28일 워싱턴 DC 백악관 집무실에서 만났지만 종전협상을 두고 설전끝에 파행으로 끝났고 공동 기자회견도 취소됐다./C-SPAN

우크라이나 사태로 ‘자강론’이 다시 부상하고 있습니다. 비핵보유국 사이에선 ‘핵 안보론’이 거세지고 있습니다. 핵무장에 대해서 진지하게 검토해보자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나라가 한국입니다. 바로 머리 위에 대남 타격용 전술핵 탄도미사일을 보유한 북한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나라는 몰라도 한국만큼은 핵개발을 할 명분이 있습니다. 핵개발과 관련해 ‘한국 예외주의’가 적용될 수 있습니다.

한국은 실제로 핵개발을 했던 나라이기도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지 않았다면 1980년 초 핵개발을 완성했을지도 모릅니다.

1975년 12월 미 국무부 기밀 문서. 박정희 대통령이 핵 재처리 기술을 확보하려는 것을 미 정부가 막으려 캐나다와 프랑스 측과 협의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미 국무부

‘뉴스레터 외설(ExTalk)’이 입수한 1970년대 미 기밀 문서(2005년 해제)를 보면, 박정희 대통령이 핵개발 중인 걸 미국이 파악한 시점은 1970년 초로, 당시 정보 분석으로 한국이 1980년이면 핵 무기를 제조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다음은 문서의 한 부분입니다.

“현재(1974년) 정보에 따르면 한국은 1980년경까지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략) 한국이 프랑스 회사와 원자로 관련 시설의 구매를 위해 협상하고 있다는 징후가 있다. (중략) 지난 2월 박 대통령은 한국 국방산업 회의에서 한국이 장거리 유도 미사일을 개발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다른 문서들을 보면, 그 무렵 주한 미국 대사관은 한국 외교부, 과기부, 국방부 당국자 등과 접촉하며 핵 개발 동향을 정신없이 파악하고 다녔습니다. 미국은 1960년대 말부터 1970년에 발효될 핵무기확산금지조약(NPT)에 한국을 가입시키려 압박했는데, 1970년대 초로 넘어가서도 한국이 NPT 가입을 하지 않고 핵 개발 움직임만 보였으니 상당히 불안해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74년에 작성된 기밀 문서에서는, 주한 미 대사관 한 관계자가 한국 외교부 조약국 관계자를 만나 정부 내부적으로 NPT 가입이 결정됐는데 왜 완결 짓지 않고 있느냐고 묻는 대목도 나옵니다. 이에 한국 외교관은 외교부는 하고 싶은데 국방부 등은 NPT를 원치 않는 것 같다는 말도 했습니다. 결국 한국은 1975년 4월 NPT에 공식 가입했습니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NPT 가입 후에도 핵무기 관련 개발을 계속 진행하며 ‘핵 능력’만큼은 키워나갔습니다. 북 위협 등 한반도 정세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여차하면 NPT에서 탈퇴하고서라도 핵국가로 전환할 역량까지는 키워놓으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핵연료 재처리 기술을 프랑스, 캐나다 등을 통해 확보하려고 했던 이유입니다.

미국은 이를 막으려 프랑스와 캐나다를 압박해 한국 핵개발에 협조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1975년 8월 27일 제임스 슐레진저 미국 국방장관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한국이 자체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노력은 소련이 한국을 핵무기로 위협하는 명분을 제공할 것”이라는 논리 등으로 핵개발을 포기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핵우산’ 제공을 핵무기의 대안으로 제시해 1977년 무렵 박정희 대통령에게 핵무기 개발을 하지 않겠다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1978년 7월 열린 제11차 한ㆍ미 ‘연례안보협의회(SCM)’에서 핵우산 제공이 처음으로 발표된 배경입니다.

프랑스 파리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작성돼 워싱턴 DC 국무부 본부와 서울 및 대만 주재 미 대사관 등에 발송된 기밀 처리된 전문이다. 파리 현지에서 미 대사관 측이 한국의 핵연료 재처리 기술 확보 관련 첩보를 입수한 내용이 정리돼 있다. 한국이 대만을 통해 원심분리기, 펄스 소팅 펌프 등 재처리 시설에 필요한 장비를 구입하려 했다는 대목이 눈에 띈다. 의뢰를 받은 대만의 한 회사는 프랑스와 벨기에 회사와 협의해 이러한 장비와 관련 기술을 얻으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프랑스 측은 미 측의 요구에 따라 이러한 제안을 거부했다. /미 국무부
프랑스 파리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작성돼 워싱턴 DC 국무부 본부와 서울 및 대만 주재 미 대사관 등에 발송된 기밀 처리된 전문. /미 국무부

그러나 이듬해인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측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암살됐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한국의 핵 개발은 끝이 났다고 합니다.

무궁화가 활짝 피었다. /뉴스1

하지만 지금 한국이 핵무장론을 거론할 수 있는 것도, 최소한 ‘핵우산’을 발전시킬 대미 협상 ‘카드’로 사용할 수 있는 것도, 박정희 시대 ‘자강론’을 바탕으로 사실상 맨땅에서 군수 산업을 일구고 1970년 NPT 체제가 막 태동하던 시기의 거센 강대국들의 압박에도 목숨을 건 도전을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궁화 꽃은 암살되지 않았습니다. 아직 살아있습니다.

오늘 외설은 여기까지입니다. 감사합니다. 구독자님.

☞외설(外說·엑스톡)은

미번역 외서와 취재 이야기, 세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전하는 뉴스레터입니다.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275744

노석조의 외설 QR코드

구독은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