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까지 미국 에너지부의 ‘민감 국가 및 기타 지정 국가 목록(SCL)’에 포함된 25개 나라는 주로 테러 우범국이거나 미국의 제재 대상국들이었다. 올 초 한국이 추가되면서 미 에너지부 지정 민감 국가는 26국으로 늘었다.
민감 국가 목록에 오른 나라 중에서 미국과 ‘상호 방위 조약’을 맺은 동맹국은 한국이 유일하다. 목록에 올라 있는 이스라엘도 미국과 동맹 관계에 있긴 하지만 문서화된 안보 조약은 없다.
미 에너지부는 국가 안보, 핵 비확산, 경제 안보 위협, 테러 지원, 지역 불안정 등을 이유로 특정 국가를 민감국 리스트에 올려왔다. 에너지부 산하 정보방첩국(OICI)뿐 아니라 중앙정보국(CIA), 국방부 등도 민감 국가 관리에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 에너지부가 작년까지 지정한 민감 국가는 중국, 대만, 러시아, 이란, 북한, 인도, 우크라이나, 이라크, 시리아, 이스라엘, 쿠바 등 25국이다. 아시아 10국, 중동 4국, 아프리카 3국, 유럽 7국, 중남미 1국이다. 일본, 호주, 뉴질랜드 같은 미국의 우방국이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은 한 곳도 없다.
한국이 미 에너지부의 민감 국가에 지정됨에 따라 원전(原電), 핵 비확산 분야는 물론 반도체, AI(인공지능), 양자, 바이오테크 등 첨단산업 분야에서 한미 간 연구·개발 협력에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원전 분야가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고 있다. 수출 통제 절차 등을 앞세워 K원전 수출의 발목을 잡아왔던 미국이 원전 연구·개발(R&D) 영역에 대해서도 영향력을 행사하려 할 것이란 전망이다. 올 초 한미 양국 정부는 원자력 수출·협력 약정(MOU)을, 한국수력원자력과 미 웨스팅하우스는 상업 협정을 맺으며 수출 계약을 앞둔 체코 원전 등 대형 원전 중심으로 파트너십을 구축했다.
하지만 차세대 원전과 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 등 미래 기술 분야에서는 미국의 한국 견제가 심해질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특히 4세대 SMR(소형 모듈 원전) 등 미국이 선도하는 기술 분야에서 양국 협력이 차질을 빚을 것이란 전망이 제기됐다. 문주현 단국대 교수는 “한국 연구진의 미국 현장 방문 승인에 예전보다 시간이 더 걸리거나, 연구에 필요한 기자재의 한국 반입도 어려워질 수 있다”고 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 분야에서도 미국이 한국과 선을 긋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 한미 양국은 2011년부터 2020년까지 파이로프로세싱(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 기술)과 소듐 냉각 고속로(SFR) 등을 연구하는 한미 핵연료주기공동연구(JFCS)를 진행했지만, 아직 1단계 연구도 매듭짓지 못하고 있다. 정동욱 중앙대 교수는 “해당 연구 2단계가 제때 진행되지 못하면서 학계에선 미국이 원전 기술과 관련해 한국을 견제하는 것 아니냐는 시각이 많다”고 했다.
현재 국내 정부출연연구기관들은 미 에너지부 산하 연구소와 광범위하게 연구 협력을 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은 2019년부터 로런스 리버모어 연구소와 재생에너지, 계산과학 등 분야에서 연구 협력을 이어오고 있고, 아르곤 국립연구소, 브룩헤이븐 국립연구소 등과도 차세대 이차전지 공동 연구를 추진 중이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은 로런스 버클리 국립연구소와 바이오 파운드리 분야에서 협력하고 있고,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은 지난 1월 아르곤 국립연구소와 차세대 반도체 기술 협력에 관한 업무협약을 맺었다.
한 연구자는 “이번 사안은 미국 연구소에서 한국 연구기관에 ‘한국이 민감 국가로 지정되는 것을 알고 있느냐, 협력에 문제가 없겠냐?’고 물어보면서 외부로 알려지게 됐다고 들었다”며 “상대 연구기관이 이렇게 신경을 쓰는 상황이니 현재 진행되고 있는 연구에도 장벽이 생길 가능성이 커 보인다”고 했다.
민감 국가 지정의 효력은 다음 달 15일 발효된다. 정부는 목록 효력 발효 때까지 미국과 협의한다는 입장이지만, 시간이 촉박해 발효 전에 민감 국가 지정을 해제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임채영 한국원자력연구원 본부장은 “아직 양국 협력에 특별한 변화는 없다”며 “좀 더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