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에너지부가 한국을 ‘민감 국가’ 명단에 올린 것과 관련, 미 측이 ‘정보 보안’ 문제가 원인이라고 18일 밝혔다. 더불어민주당 등 국내 일각에서 제기하는 ‘핵무장론’ ‘계엄령’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민주당은 ‘윤석열 정부의 핵무장 야욕에 대한 미국의 경고’라며 공세를 이어갔다.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은 이날 외교부·산업통상자원부·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관계 부처 차관을 소집해 내달 15일 민감 국가 발효 전까지 한국을 명단에서 빼기 위한 총력 대응 지시를 내렸다. 이번 사건은 지난 10일 한 언론 보도 이후 지난 일주일간 여야 공방이 벌어지는 등 논란이 돼왔다.
조셉 윤 주한 미국 대사 대리는 이날 주한미국상공회의소(암참) 행사에서 “민감 국가 지정이 큰 문제인 것처럼 상황이 통제 불능이 된 것은 유감이다. 그런데 이건 별일이 아니다(it’s not a big deal)”라며 “미 에너지부 산하 연구소 방문객 중에 민감 정보를 부주의하게 취급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보안 문제라는데… 與 “美서 李 불신” 野 “핵무장론 경고”
윤 대사 대리는 “민감 국가 명단은 오로지 에너지부의 연구소 실험실에만 국한된 것”이라며 다른 미 부처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는 “에너지부 산하에 여러 실험실이 있는데 지난해는 2000명이 넘는 한국 학생·연구원·공무원 등이 민감한 자료가 있는 연구실을 방문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런 민감한 정보는 실험실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 그런데 실험실에 한국인이 너무 많이 와서 일부 사건이 생겼고, 그래서 민감 정부 명단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했다. 한국 연구원 또는 공무원이 실험실에서 민감 정보를 유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윤 대사 대리는 민감 국가 지정이 ‘정책적 결정’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일부 한국 언론과 전문가가 이번 문제를 미 정부의 정책적 결정으로 해석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번 조치는 미 연구소 보안 차원의 내부 조정”이라면서 “인공지능(AI), 바이오 기술 분야를 포함한 한미 간 협력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했다.
윤 대사 대리는 이날 보안 문제를 민감 국가 원인으로 언급하면서도 구체적 사건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 우리 외교부도 미 정부에서 ‘보안 문제’ 때문이란 설명을 들으면서도 특정 사건에 대해선 설명을 듣지 못했다고 한다.
다만 미 에너지부 감사관실이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적시한 사건이 이와 직접적으로 연관됐을 가능성이 높다. 본지가 입수한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10월부터 지난해 3월 사이 에너지부 산하 아이다호 국립연구소(INL)의 한 도급 업체 직원이 ‘원자로 설계 소프트웨어’를 소지한 채 한국행 항공기에 타려다 체포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이 직원이 유출하려 한 자료는 에너지부의 특허 정보로 높은 수준의 수출 통제 대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감사관실은 “직원의 정부 이메일과 메신저 기록을 조사한 결과 이 직원이 정보가 수출 통제 대상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직원과 외국 정부 간 소통이 있었다”고 밝혔다. 다만 외국 정부와 어떤 소통이 있었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보고서에는 ‘외국 정부’가 구체적으로 적시돼 있지 않지만, ‘한국행 항공기’ 등으로 미뤄볼 때 ‘한국’일 가능성이 높다. 현재 이 기밀 유출 사건은 미 연방수사국(FBI)이 수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 측이 직접 민감 국가 지정 원인을 밝혔지만, 정치권에선 ‘여권의 핵무장론’을 탓하는 발언이 이어졌다. 민주당 박선원 의원은 “(윤석열 정부가) 핵무장 하면 민주주의 유지할 필요 없다는 뜻으로 핵무장을 보고 있기 때문에 바이든 행정부가 경고를 발신하고 결국 외교 참사가 일어난 것”이라고 했다. 박 의원은 지난달 강연에서 “핵무장이라고 하는 주제를 우리 스스로 금기시할 필요가 없다”고 한 바 있다. 앞서 더불어민주당 외교·안보 특보단장인 위성락 의원은 “(민감 국가 지정은) 한국 내 핵무장론에 대한 깊은 의구심과 문제의식이 미국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고, 문재인 정부에서 외교부 차관을 지낸 최종건 연세대 교수는 “독자 핵무장이라는 매우 비뚤어진 욕망을 가진 윤석열 정권을 신뢰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했었다.
민주당은 미 에너지부가 INL 직원을 보안 문제로 적발한 일에 대해서도 “윤석열 정부의 핵무장 시도를 견제한 것”이라고 했다. 민주당 외교‧산업‧정보위원회 소속 위원들은 기자회견에서 “해당 사건은 FBI와 국토안보 수사국이 공동으로 조사 중이라고 한다”며 “일련의 기술 유출 사건은 윤 정부가 핵무장을 추진한다는 의심을 굳혀주는 결정적 계기가 됐을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여권은 민주당이 명확한 확인 절차 없이 정치 공세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여당 의원들은 이날 성명서를 내고 “민주당은 근거 없는 음모론으로 국민을 오도할 게 아니라, 미국 조야에 팽배해 있는 이재명 대표와 민주당을 향한 걱정 어린 시선부터 불식하는 데 힘써야 할 것”이라며 “음모론 생산을 당장 그만두고, 각종 괴담으로 국민을 선동한 것에 대해 국민께 진심으로 사과하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