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4년 한국의 안보리 회부 위기 ③회·끝]
지난 회에서 계속됩니다
노무현 정부는 2004년 후반에 생각지도 못했던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2000년 농축 우라늄 분리에 이어 1982년 플루토늄 추출 실험이 알려지면서 자칫 ‘핵 개발 의혹’으로 유엔 안보리에 회부될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원자력연구소가 두 실험을 통해서 얻은 것은 불과 1g도 안 됐지만, 그 파문은 핵 폭탄 위력처럼 컸습니다.
◇청와대 일각 “유엔 안보리 갈 수밖에”
미국은 국무부 군축담당 존 볼턴 차관 등을 중심으로 한국을 유엔 안보리에 회부하겠다는 입장이 확고했습니다. 영국, 프랑스 등 EU(유럽연합) 국가들도 이에 동조했습니다. 부시 행정부는 한국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서 “단순한 청취 차원”이라는 논리를 폈습니다. “IAEA의 다른 회원국들이 한국의 두 차례 핵 물질 실험을 문제 삼고 있으므로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제재 목적이 아니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안보리에서 들어보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청와대 NSC를 중심으로 미국과 주요 국가들이 유엔 안보리 회부를 결정한 이상, 이를 받아들여 조속히 마무리하는 편이 낫다는 분위기가 형성됐습니다. 총력 외교로 우리나라가 안보리에 회부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오준 당시 외교부 국제기구정책관(나중에 주싱가포르·주유엔 대사 역임)의 회고입니다. “외교부 내에서도 어차피 안보리에 가는 것을 못 막을 텐데, 이를 피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맞느냐.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것처럼 안 되는 일에 대해 외교적인 노력을 하다가 나중에 막지 못하면 사태가 더 커질 것이라고 우려하는 간부들도 있었다.”
◇ 조창범 대사 “안보리 회부 불가피론은 안이한 생각”
IAEA 본부가 있는 빈에 주재 중이던 조창범 당시 주오스트리아 대사는 국내의 이 같은 분위기를 전해 듣고 급히 귀국했습니다. 외무고시 6회 출신의 조 대사는 주유엔대표부 차석대사, 외교정책실장 출신으로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 동향에 밝았습니다. 조 대사는 오준 국장 등과 ‘안보리 회부 절대 불가’론을 강하게 피력했습니다. 조 대사는 노무현 정권의 외교안보 분야 실세였던 이종석 NSC 사무처장을 만나 설득했습니다.
조 대사는 “유엔 안보리가 한국의 핵 물질 실험을 단순히 청취하는 것으로 포장한다고 해서 사태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유엔 안보리에 회부되는 것만으로도 불명예인데, 이를 간단하게 생각하는 것은 너무도 안이한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북핵 해결에 좋지 않은 영향 우려
조 대사 등은 특히 한국이 유엔 안보리에 핵 문제로 회부될 경우, 북핵 문제 해결에 대한 악영향을 우려했습니다. 북핵 문제는 당시에도 심각했습니다. 북한은 2002년 10월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 방북 당시 농축우라늄 개발을 밝히며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 안보리에 회부됐습니다.
유엔 안보리는 2004년 2월 IAEA가 북핵 문제를 회부한지 5일 만에 비공식 회의를 개최, 이 문제를 안보리의 공식 토의로 넘겨 계속 논의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핵에 이어 남핵(南核)문제가 안보리에 오르는 것은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외교부는 반기문 장관의 지시로 IAEA 이사국들을 대상으로 전방위적인 외교전을 펼쳤습니다. IAEA에서는 미국 외에도 영국, 네덜란드 등이 한국의 규정 위반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습니다. 외교부는 맨투맨 방식으로 각국 대사들을 만나 한국 정부가 자진 신고한 것을 강조하며 안보리 제재까지 가지 않도록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IAEA 34개 이사국 중 제3세계권으로 분류되는 10여 개 국가에 대해서도 우리의 실험이 과학자의 호기심에서 시작된 것으로 핵 개발 의지와는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한국은 농축이나 재처리 프로그램은커녕 핵무기 개발 계획도 전혀 없다”며 진화를 시도했습니다.
외교부는 IAEA 이사회가 열리기 직전인 2004년 11월 20일 칠레의 산티아고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한미 정상회담이 열리는 데 주목했습니다. 조창범 대사는 오스트리아에서 반기문 장관에게 친전(親展) 보고서를 보내 한미 정상회담에서 IAEA와 관련 문제를 노무현 대통령이 언급하도록 요청했습니다.
◇ 파월과 라이스, IAEA 선에서 마무리 합의
2004년 11월 25~26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한국의 핵물질 실험 문제를 다루는 IAEA이사회가 열렸습니다. 그동안 IAEA 안전 조치를 위반한 북한, 이라크, 리비아, 루마니아는 예외 없이 유엔 안보리에 보고됐기에 비관적 전망이 많았습니다. 한국이 핵무기를 개발할 의도가 없었다 해도 명백한 위반 사안에 대해서는 똑같이 제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워싱턴포스트가 11월 25일 한국에 낭보(朗報)를 전했습니다. “콜린 파월 국무장관과 콘돌리자 라이스 국가안보보좌관이 전화 통화로 한국의 핵물질 실험을 안보리에 보고하지 않기로 입장을 정했다”고 한 것입니다. 비슷한 시각, 부시 행정부도 우리 측에 같은 사실을 알렸습니다.
WP의 보도대로 미국 대표는 IAEA 이사회에서 “이번 사태에서 한국의 사후 조치가 다른 나라에 모범이 됐다. 통상 사찰(normal inspection)로 이 문제를 추가 확인하고 적절히 보고하는 게 바람직하다”며 IAEA 차원에서 마무리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미국의 입장 변화를 계기로 다른 나라도 안보리 회부를 주장하지 못했습니다.
◇ 일본도 막판에 입장 선회
일본이 막판에 한국이 유엔 안보리에 회부되지 않도록 도왔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원래 한국의 핵 물질 실험 사건에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2004년 9월 9일 일본 관방장관은 “한국의 비밀 플루토늄 추출 행위는 매우 부적절하다”며 공식 설명을 요구했습니다. 일본의 신문들은 사설을 통해 이번 사태가 충격적이라며 한국 정부의 설명이 “납득하기 어렵다”고 지적했습니다. 북핵 해결을 위한 6자회담 진전에 장애가 될 수 있다고 우려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IAEA 이사회를 앞두고 입장을 바꿨습니다.
2004년 주미대사관에서 근무했던 한 외교관의 회고입니다. “미국이 우리를 안보리에 회부하려고 할 때 국무부 현관에서 일본 외교관을 우연히 만났다. 그가 내 팔을 잡고 ‘우리 입장이 바뀌었다. 한국이 안보리에 회부하지 않도록 도와줄 것’이라고 했다.” 이 외교관은 “일본이 북핵 문제에 대한 한미일 3국 협력을 고려, 선회한 것으로 안다”고 했습니다.
◇총력 외교끝에 의장 성명으로 마무리
IAEA는 11월 26일 이틀째 열린 이사회에서 한국의 핵물질 실험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면서도 즉각적인 시정 조치와 협력을 환영한다는 7개 항의 ‘의장 성명(statement)’을 채택했습니다. 이는 결의문(resolution)보다는 강도가 약한 경고였습니다.
이로써 3개월간 국제사회에서 논란이 됐던 한국의 핵 개발 의혹은 유엔 안보리에 보고되지 않은 채 IAEA 이사회 수준에서 일단락됐습니다.
2004년에 표면화된 한국의 핵 물질 실험 논란은 여러 면에서 복기가 필요합니다. 이는 한국의 핵 관련 활동에 대한 국제사회의 경계심을 키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당시만 해도 원자력연구소의 핵 물질 실험은 해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북한 핵 문제로 대화로 풀 수 있다는 순진한 정책이 우리 국민을 현혹시키고 있을 때여서 정부 안팎에서 원자력연구소는 일방적으로 비난받았습니다. 한국은 그동안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분야에서 모범 국가였지만, 이로 인해 국제사회의 신뢰가 손상됐습니다. 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핵 개발 추진과 함께 전 세계 비확산 전문가들 사이에서 ‘전과 2범’으로 불리는 계기가 됐습니다.
◇ “한국 과학자들이 해야 할 일을 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지금은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북한이 6차례 핵실험을 거치며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면서 한국도 핵무장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1982년, 2000년 당시의 핵 물질 실험은 재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여론도 일고 있습니다. 당시 원자력연구소 과학자들이 할 일을 했다는 겁니다.
조창범 대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2000년 농축 우라늄 분리 실험은 그 민감도가 꼭대기까지 거의 간 것이다. 양은 얼마 안 되지만, 기술적으로는 ‘이크’ 하고 놀랄 정도의 연구 성과를 거둔 것이다. 미국과 프랑스 등의 전문가들이 신경을 써야 할 만한 수준의 발전이었다. 농축이라는 것은 그 작업을 반복하면 얼마든지 그 양도 늘릴 수 있고, 농도도 더 깊이 할 수 있다. 최근 한국의 핵 무장론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번 습득한) 기술은 기술이다.”
미국과 IAEA 관계자들도 비슷한 얘기를 우리 외교관들에게 했다고 합니다. “한국이 핵 물질 실험으로 한번 습득한 능력(capability)은 어디로 사라지지 않는다.”
이 사태는 외교적인 측면에선 미국과 서방 선진국들을 상대로 해 처음으로 거둔 ‘승리’임에도 사안의 특이성 때문에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한국을 유엔 안보리에 회부하려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에 맞서서 IAEA 의장 경고로 마무리한 것은 큰 성과였지만, 외교부는 이에 대해 낮은 자세를 유지해왔습니다.
이 사태가 벌어졌을 때 과장급이었던 외교관의 회고입니다. “2004년 북한에 이어 남한이 핵 개발 의혹으로 유엔 안보리에 회부될 위기에서 우리가 펼친 절박한 외교는 미국과 서방 선진국을 능가했다. 외부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외교적 승리라고 할 수 있다. 이 사태를 겪으면서 우리 외교가 어느 정도 수준에 올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무 국장으로 사태 해결을 위해 뛰었던 오준 대사도 “한국이 유엔 안보리에 회부되지 않도록 한 것은 나의 외교관 생활에서 가장 잘한 외교로 여기고 있다. 30년 넘게 외교관 생활을 하면서 국가에 대한 공로로 훈장을 2개 받았던 일보다 더 보람차게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시간이 좀 더 흐른 후, 0.2g 농축 우라늄 분리 실험 사건에 관련됐던 과학자들과 외교관들이 우리 역사에서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