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사관학교 교정에 설치된 흉상 철거이전 논란이 한창인 독립투사 5인 가운데, 북한 당국이 공식백과사전인 조선대백과사전을 통해 홍범도 장군(1868~1943) 1인에 관해서만 유일하게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반면, 나머지 4인인 이회영(1867~1932), 지청천(1888~1957), 김좌진(1889~1930), 이범석(1900~1972)에 관해서는 일언반구조차 기술하고 있지 않아 대조적이다. 심지어 북한 당국은 김좌진 장군과 홍범도 장군이 함께 지휘한 ‘청산리전투’를 기술하는 대목에서도 김좌진의 이름은 생략한 채 홍범도만 청산리전투의 주역으로 기술하고 있어 그 배경이 주목된다. 아울러 조선대백과사전은 항일 무장독립투쟁의 산실인 ‘신흥무관학교’를 기술한 대목에서도 설립자 중 한 명인 우당 이회영 선생(이종찬 광복회장의 조부)의 이름 역시 쏙 빼고 서술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北, 육사 흉상 5인 중 홍범도만 기술
조선대백과사전은 홍범도 장군을 서술하는 대목에서 김일성 전 주석의 언급까지 인용했다. 홍범도 장군을 ‘반일(反日)의병대장’ ‘독립군지휘관’으로 소개하면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었다”며 “유명한 의병대장인 홍범도는 자체로 쇠돌을 녹여 화승대(화승총)를 만들고 철알을 부어 가지고 왜놈을 무찔렀다”는 등 ‘김일성 전집’에 나오는 말을 인용해 홍범도의 업적을 소개했다.
북한 당국은 대개 ‘위대한 수령’으로 떠받드는 김일성의 무장투쟁만 인정하고, 다른 무장투쟁에는 지극히 인색한 평가를 보인다. 실제 조선대백과사전에서는 상하이 임시정부 계열의 무장독립투쟁인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훙커우공원 의거나, 이봉창 의사의 도쿄 사쿠라다몬 의거는 아예 찾아볼 수조차 없다.
하지만 북한 당국은 홍범도 장군의 항일 무장투쟁과 관련해서는 이례적으로 극찬에 가까운 서술을 이어간다. 조선대백과사전은 “홍범도 의병대는 파발리전투, 후치령전투, 삼수성전투, 갑산전투를 비롯한 수많은 전투들을 벌려 일제침략자들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며 “그는 전투들마다에서 일제침략자들과 그 주구들을 무자비하게 처단하고 적(敵) 통치기구들을 파괴소각하였으며 인민들의 생명재산을 보호하였다”고 기술했다.
아울러 “그는 주체 9년 6월 봉오골(봉오동)전투와 같은해 10월 청산리전투에 참가하여 일제침략자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고 당시의 소만(소련·만주) 국경 일대에서 독립군 활동을 계속하였다”고 기록했다.
북한 당국의 이 같은 역사기술은 홍범도 장군이 소련군 대위 출신 김일성처럼 주로 북만주와 소련 영내에서 활동한 ‘친소파’ 공산주의자였다는 동질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조선대백과사전은 “(홍범도는) 그후 독립군부대들의 통합을 위하여 힘쓰는 한편, 반일무장활동을 확대하기 위하여 부대를 이끌고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였으며, 그 일대에서 소련에 대한 제국주의 열강들의 무력간섭이 종식될 때까지 붉은군대(소련군)와 함께 일제침략군과 백파군(러시아 내전 당시 백군)을 반대하여 견결히 투쟁하였다”며 “홍범도는 주체 10년 11월부터 주체 11년 2월까지의 사이에 독립군 대표로 모스크바에 가서 레닌을 만났다”고 서술하고 있다.
실제로 홍범도는 ‘자유시 참변(1921년 6월)’ 직후인 같은해 11월 모스크바를 찾아 레닌을 만났고, 레닌으로부터 권총과 금화를 선물로 하사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1927년에는 소련공산당에 가입했고, 1943년 카자흐스탄에서 생을 마치고 현지에 매장됐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지난 2021년 카자흐스탄 키질오르다에서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고 김정숙 여사와 함께 성대한 환영식을 개최했다. 국내로 들여온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현재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돼 있고, 묘비는 ‘신영복체’로 새겨져 있다. 고(故)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는 육사 교수로 재직할 때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언도받은 바 있다.
‘청산리전투’도 김좌진 빼고 홍범도만 기술
특히 북한 당국의 홍범도 장군에 대한 편애는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를 서술한 대목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조선대백과사전은 ‘주체 9년(1920) 6월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부대가 일제침략군을 격멸한 전투’라고 ‘봉오골전투’를 소개하면서 “홍범도는 자기가 지휘하는 ‘조선독립군’ 부대와 ‘북로군정서’에 속하여 있던 다른 독립군부대를 6월 4일 봉오골 부근에 매복시키었다”며 최진동, 안무 등 다른 지휘관의 이름을 생략하고 오로지 홍범도만 부각시킨다. 조선대백과사전에 최진동과 안무 등 봉오동전투의 다른 주역들 역시 등장하지 않는다.
북한은 ‘청산리전투’를 언급하는 대목에서도 북로군정서 총사령관인 김좌진의 이름은 생략한 채 홍범도만 전투의 주역으로 서술했다. 청산리전투는 북한 당국도 “봉오골전투와 함께 독립군운동 때 반일 독립군 부대들이 진행한 가장 큰 싸움”으로 인정하는 전투다.
하지만 조선대백과사전은 “적들의 기도를 안 독립군 부대들은 홍범도(1868~1943)의 지휘 밑에 청산리 일대에 매복하고 있다가 10월 21~22일 사이에 걸쳐 이곳에 기어든 적을 불의에 쳐서 수많이 살상하고 놈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고만 기술했다. 청산리전투에는 김좌진 장군뿐만 아니라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북로군정서에 활동한 이범석 장군도 참전했으나 역시 조선대백과사전 서술에서는 이름이 빠졌다.
북한 당국이 ‘청산리전투’를 기술하면서 그 주역인 김좌진 장군의 이름을 삭제한 까닭은 김좌진이 줄곧 반공(反共) 노선을 걸었고, 1930년 1월 공산당원 박상실에 의해 피살된 것이 주요 이유 중 하나로 추정된다. 박상실은 김좌진 암살 이듬해 중국 현지 당국(봉천군벌)에 의해 체포돼 사형에 처해졌다. 청산리전투의 두 주역인 김좌진과 홍범도에 대한 평가가 공산당적 유무에 따라 판이하게 갈라진 것이다.
심지어 조선대백과사전은 항일 무장투쟁의 와해를 가져온 ‘자유시 참변’을 서술하면서도 유독 홍범도에게만 관대한 서술을 한다. 조선대백과사전은 ‘자유시 참변’을 ‘흑하(黑河·흑룡강)사변’으로 소개하며 “종파분자들의 파벌싸움에 의하여 1921년 6월 로씨야(러시아)의 원동지방에 있는 자유시에서 벌어진 조선독립군들 사이의 유혈적인 충돌사건’으로 부정적으로 서술한다. 한데 조선대백과사전은 이른바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를 “추악한 파벌싸움을 벌이는 종파분자”라고 싸잡아 비난하면서도 “홍범도를 비롯한 견결한 항일독립운동자들”이라며 홍범도에 대해서는 이례적인 태도를 보인다. ‘흑하사변’에서 유일하게 실명을 언급한 사람도 홍범도가 유일하다.
반면 홍범도 흉상 철거이전을 주장하는 측은 ‘자유시 참변’ 전후 홍범도의 행적과 관련해 수많은 의문을 제기해 왔다. ‘북한과 소련’ 저자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국민대 책임연구원은 “홍범도가 북한 출신이고, 김일성이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조선대백과사전도 홍범도를 높이 평가한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