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탈주’의 실제 주인공인 정하늘씨가 1일 본지와 인터뷰를 가졌다. 그는 “앞으로도 나처럼 자유를 찾아 DMZ를 넘어오는 북한 병사들은 계속 있을 것”이라고 했다. /조인원 기자

“비무장지대(DMZ)는 감시 경계가 한 번도 삼엄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앞으로도 나처럼 자유를 찾아 DMZ를 넘어오는 북한 병사들은 계속 있을 겁니다.”

2012년 휴전선 철책을 넘어 탈북한 정하늘(30)씨는 1일 서울 중구 충무로의 한 사무실에서 가진 본지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죽을 각오를 하기까지가 힘들지 하고 나면 무서울 게 없어진다”고 했다.

정씨는 북한 병사의 탈북 이야기를 소재로 한 영화 ‘탈주’의 실제 주인공이다. 지난 7월 개봉한 ‘탈주’에서 배우 이제훈이 연기한 북한 병사 ‘규남’은 최전방 군부대에서 10년 만기 제대를 앞두고 목숨을 걸고 철책 너머 탈주를 감행한다. 영화와 달리 정씨는 군 복무 1년 5개월쯤 된 2012년 8월 DMZ 철책을 넘었다.

정씨는 1994년 함흥에서 태어나 중학교 졸업 이후 군에 입대했다. 그가 18세가 된 2012년은 김정일 사망 이후 김정은이 집권한 첫해였다. 정씨는 “조국 통일을 약속했던 김정일은 죽어 버리고 통일은 이뤄지지 않았다”며 “믿을 건 통일밖에 없었는데 실망이 너무 커서 김정일 사망 이후부터 남한에서 날려보낸 대북전 단을 주워 보기 시작했다”고 했다.

대북 전단은 18세 젊은 병사의 마음을 요동치게 했다. 전단엔 김정은 체제에 대한 비판적 내용이 담겨있었다. 정씨의 탈북을 결심하게 만든 결정적인 내용은 전단 마지막 장에 써 있던 “대한민국은 전력이 풍부하고 수림이 무성한 경제 강국”이란 짧은 문구였다. 그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머리를 한 방 맞은 것 같았다. 그때부터 열심히 평소 관심 없던 감시 근무를 서면서 탈북을 계획했다”고 했다. 밤이면 쌍안경으로 DMZ 너머 남한 마을에서 빛나는 불빛을 쳐다봤다고 한다.

머릿속으로 수없이 ‘탈북 시뮬레이션’을 했던 정씨는 태풍이 불어닥친 2012년 8월 어느 날을 ‘디데이’로 잡았다. DMZ에는 전기 철조망과 가시 철조망 등 3중으로 철책이 설치돼있는데 강력한 태풍으로 이 철책들이 모두 파괴됐다. 정씨는 “때마침 그날 같이 근무를 서던 선임은 낮잠을 잔다며 사라졌다. 하늘이 준 기회였다.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정씨는 수류탄 2발을 양쪽 주머니에 나눠 넣고 AK소총과 탄약 90발을 챙겨 DMZ 철책으로 향했다. 수류탄은 북한군 추적조에 붙잡힐 경우에 대비한 ‘자폭용’이었다.

철책은 무사히 넘었으나 예상치 못한 장애물과 만났다. 정씨는 “북측 경비 구역에서 DMZ 지역을 내려다봤을 때와 달리 실제로 가보니 내 키를 훌쩍 넘는 2m의 갈대밭과 가시덩굴이 있었다”며 “하나하나 헤치고 나오느라 온몸이 가시에 찔려 피가 흘렀고 군복은 다 찢어졌다”고 했다. 약 2km 구간의 DMZ를 넘는 데 걸린 시간은 18시간. 정씨는 “그 18시간 동안의 일은 지금도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안 된다”며 “DMZ 갈대밭에서의 첫날 밤 북한군이 내 이름을 부르고 AK총탄 12발이 머리 위로 지나가고 갈대밭 옆 강물에 총탄이 떨어졌다”고 했다. DMZ를 넘는 동안에만 몸무게 2kg이 빠졌다고 한다. 탈북 직후 43kg였던 그는 현재 67kg이다.

올해로 남한 정착 12년째인 그는 “남한에 온 이후에도 힘든 때가 많았지만, 그때마다 목숨 걸고 넘어왔던 날을 떠올린다”고 했다. 그는 한국에 온 뒤 6년 동안 공부해 2018년 대학에 입학해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다. 2020년 2월부터는 본인과 마찬가지로 2016년 DMZ 철책을 넘어 탈북한 김강유씨와 함께 북한군 실상을 알리는 유튜브 채널 ‘북시탈’을 운영하고 있다. 북한군의 열악한 인권 상황을 알리고자 시작한 일이었다. 정씨의 유튜브 방송을 본 영화 ‘탈주’의 제작사 관계자가 연락해 자문을 구하고 단역 출연을 제의하면서 그는 영화계와 인연을 맺었다. 올해 1월엔 그가 제작·감독을 맡은 단편영화 ‘두 병사’도 개봉했다. 북한군의 인권 실태를 담은 영화다.

북한 병사의 탈북 이야기를 소재로 한 영화 ‘탈주’의 한 장면.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정씨는 “어느 사회든 차별이 없을 수는 없지만 탈북민을 향한 편견과 차별이 사라지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도 먹고살기 힘든데 왜 북한 주민까지 책임져야 하냐, 통일은 손해 아니냐는 식의 통일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개선됐으면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