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남북관계를 ‘적대적 2 국가’로 규정하며 휴전선 일대 장벽을 설치했다. 하지만 35년 전 할아버지 김일성 시대에 북한은 남한을 향해 “나라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콘크리트 장벽은 민족 분열과 북남대결의 상징”이라며 장벽 철거를 요구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통일부는 13일 1984년 9월부터 1990년 7월까지 정치·경제·체육 분야 남북 회담 문서 2266쪽이 담긴 남북대화 사료집 12, 13권과 남북대화 사료집 회의록 제2권을 공개했다. 1989년 2월부터 1년 5개월간 이어진 남북고위급회담 예비회담 회의록을 보면 북한은 휴전선 인근 콘크리트 장벽 철거를 요구하며 남한이 교류 물꼬를 트는데 소극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당시 북측 대표 백남순은 1990년 1월 31일 제6차 예비회담에서 우리 군이 구축한 대전차 방어용 울타리를 두고 “나라 안에 군사분계선이 있는 것만 해도 가슴 아픈 일인데 인공적으로 쌓아놓은 장벽까지 있는 것은 민족의 수치가 아닐 수 없다”고 했다. 훗날 외무상에 오른 백남순은 당시 정무관 참사 직함으로 백남준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백남순은 고위급회담 절차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장벽 철거 문제를 제기해 토의를 피하고 있다는 남측 회담 대표 지적에 “콘크리트 장벽을 허무는 것으로부터 그 폐쇄 정책을 없앨 데 대해서 표시해야 한다”고 맞받아쳤다.
김일성 시대 북한은 한반도 전체 공산화 의도가 깔린 ‘평화통일’ 입장을 견지했다. 북한은 남북 회담 명칭을 놓고도 남북이 하나의 민족인만큼 다른 국가라는 인상을 주는 명칭은 사용할 수 없다며 강하게 반대할 정도였다. 백남순은 1989년 11월 15일 제4차 예비회담에서 “고위당국자 회담 또는 총리회담이라는 귀측의 회담 명칭에는 우리 인민의 통일 의지가 잘 반영되어 있지 못하며 나라와 나라 사이의 회담에서 일반적으로 호칭되는 명칭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고 했다. 회담 합의서에 국호를 표기하는 것도 “나라와 나라 사이에 채택하는 합의서가 아니라 한 나라 안에서 같은 민족끼리 경제협력과 교류를 실현하기 위해 채택하는 합의 문건인 만큼 서명란에다 국호를 써넣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이날 공개된 남북회담 자료에는 북한이 세계청년학생축전(1989년) 개최 이후 전력난 등 경제난 징후가 드러난 일화도 포함됐다. 1989년 3월 판문점 북측 시설인 통일각에서 열린 남북고위급회담 2차 예비회담 때 정전으로 회담이 중단되자 남측 대표는 “전력이 좀 어려우신가요? 우리는 요즘 전기가 상당히 풍부한데, 그런 측면에서도 우리가 빨리 남북교류도 많이 확대해 가야”라고 했다. 이에 북측 대표는 “전력은 우리가 옛날에도 남측에 보내주겠다고 그랬습니다. 전력이야 뭐 우리 쪽만큼 하는 데 있습니까”라고 쏘아붙였다. 북측 대표는 갑작스러운 정전에 “물 마시면서 전기 오면 (회담을 계속)합시다”라고 했다. 정전은 10분 이상 지속했다고 한다. 정부 당국자는 “88서울올림픽 개최에 자극받은 북한이 당시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국가적 역점사업으로 추진할 때였는데 경제에 무리가 갔던 걸로 보인다”며 “1990년대를 앞두고 경제난 심화 징후가 이때부터 나타났다”고 했다.
이날 공개된 사료집에는 분단 이후 최초로 개최된 남북경제회담(1984년 11월∼1985년 11월)과 남북국회회담 예비접촉(1985년 7∼9월), 남북고위급회담 예비회담(1989년 2월∼1990년 7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중재로 열린 로잔 남북 체육 회담(1985년 10월∼1986년 6월) 등의 진행 과정과 회의록이 포함됐다. 남북회담 문서는 2022년 이래 이번이 여섯번 째 공개다. 통일부는 더욱 편하게 남북 회담 문서를 열람할 수 있도록 온라인 방식을 도입했다. 공개 목록과 방법은 통일부 남북관계관리단 홈페이지(https://dialogue.unikorea.g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