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여권 국회의원 70여명이 8월 한·미 연합훈련의 연기를 촉구하는 연판장을 돌린 데 이어 5일 오후 기자회견을 열어 훈련의 조건부 연기를 공식 요구했다. 북한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이 지난 1일 밤 담화에서 한·미 연합훈련 실시 전망에 대해 “기분 나쁜 소리” “재미없는 전주곡”이라며 훈련 연기·취소를 노골적으로 요구한 지 나흘 만이다.
야권에선 “대한민국 집권 여당이 김여정 하명부냐” “김여정이 문재인 정부 상왕이냐”는 말이 나왔다.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장은 “집권 여당이 국가안보와 한미동맹을 외면하고 북한의 주장·이익에 영합하고 있다”며 “김정은·김여정 남매는 이들을 ‘쓸모있는 바보’(useful idiots)로 여길 것”이라고 했다. ‘쓸모있는 바보’는 냉전 시절 소련 공산 체제를 옹호·지지하던 서방 인사들을 가리켜 레닌이 쓴 말이다.
이날 범여권 의원들의 집단행동은 김여정이 대한민국의 주권적 결정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최소 5번째 사례가 된다. 앞서 김여정이 작년 6월 대북 전단 살포를 비난하며 우리 정부에 “(금지)법이라도 만들라”고 요구하자 통일부는 4시간여 만에 예정에 없던 브리핑을 자청해 “준비 중”이라고 발표했고 민주당은 전단금지법을 단독 처리했다. 김여정이 지난 5월 탈북민들의 전단 살포를 두고 “통제를 바로 하지 않은 남조선 당국이 책임지게 될 것”이라고 했을 때는 곧장 경찰청장이 “철저한 수사를 통해 엄정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김여정 담화에 한국 정부 장관들도 줄줄이 교체됐다. 김연철 전 통일부 장관은 작년 6월 김여정의 예고대로 북이 개성 남북 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자 이튿날 “남북 관계 악화의 책임을 지겠다”며 떠밀리듯 사의를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과 임기를 함께할 것으로 관측됐던 강경화 외교부 장관도 ‘김여정 데스노트’에 이름이 오른 지 한 달 만에 교체됐다.
정경두 전 국방장관의 경우 작년 6월 김영철 당시 당중앙위 부위원장의 비난 담화 2개월여 만에 물러났다. 김영철이 대남·대미 사업을 총괄하는 김여정의 지휘 아래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정 전 장관 교체에도 김여정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볼 여지가 있다. 전직 청와대 관리는 “김여정이 우리 외교·통일·국방장관을 모두 갈아치운 셈”이라고 했다.
문제는 북이 남북 간 통신선 복원을 ‘대남 시혜’로 간주하고 한·미 연합훈련 중단 요구를 시작으로 제2, 제3의 청구서를 보내올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국책연구소 관계자는 “연합훈련뿐 아니라 우리 군의 단독 훈련, F-35를 비롯해 예산에 반영돼 순차 도입될 무기 체계에 대해 트집을 잡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