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관계자들은 “2021년은 정말 악몽 같은 한 해였다”고 말한다. 연초부터 북한 귀순자 ‘헤엄 귀순’ 경계 실패(2월)를 시작으로, 부실 급식·방역 인권 침해 논란(4월), 성추행 피해 공군 여중사 사망(5월), 청해부대 34진 코로나 집단 감염(7월), 성추행 피해 해군 여중사 사망(8월), 성추행 피해 공군 여하사 사망 폭로(11월) 등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서욱 국방부 장관은 올해에만 대국민 사과를 7번 해야 했다. 전 세계에 유례가 없는 일이다. 정치권·시민단체로부터의 사퇴 요구도 거셌다. 군 고위 관계자는 “사고 한 건만 더 터지면 우린 이제 끝장이라는 각오로 자구책을 고심하고 있다”고 했다. 서 장관 등 군 지휘부는 참모들과 예정됐던 송년회를 모두 취소하고 전방 방역 상황 등을 점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MZ세대 대대장’ 시대 준비해야
MZ세대의 병영 불만에 대해 전방의 한 대대장은 “올해는 어떻게든 대대장들이 ‘까라면 까자’라는 식으로 자기 몸을 갈아 넣는 식으로 막았다”며 “그런데 몇 년이 지나 MZ세대가 대대장이 돼 ‘내가 왜 까? 나도 힘들다’고 박차고 나가면 군대는 어떻게 되겠느냐”고 했다.
MZ세대와의 소통·조화는 군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숙제다. 박은정 민관군 합동위원회 공동위원장은 지난 10월 “능력주의를 신봉하는 공정의 세대인 MZ세대의 병역 유입으로 권위와 통제에만 익숙했던 군 지휘 체계가 구시대 유물로 전락했다”고 했다. 수십 년 동안 누적돼온 군의 구조적 모순이 단번에 드러났다는 것이다.
군은 이 같은 구조적·복합적 문제 해결 방안을 찾기 위해 정치권과 시민 사회·학계 등과 함께 머리를 맞대는 것을 고민하고 있다. 국방부 관계자는 “전 국가적인 위기 상황에서 올해 발생한 사건·사고는 군 자체 역량만으로 대처하기 어려운 측면이 분명 있었다”고 했다.
다만 군 일각에선 청와대나 정치권이 군을 너무 불신하고 일방적으로 다그치기만 한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도 나왔다. 일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부실 급식 관련 민원이 올라오면 청와대에서 ‘지금 뭐하고 있느냐’ ‘빨리 상황 보고하고 대응하라’ 등 지시를 쉴 새 없이 내렸다는 것이다. 이에 일부 부대는 ‘SNS 대응반’까지 설치하면서 상황 해결에 집중할 수 없었다고 한다. 들끓는 여론과 정치권 비난에 끼어 옴짝달싹 못하게 된 간부들은 “탈영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D.P.’가 예비역 남성들의 군 트라우마를 자극하며 흥행했듯, 부실 급식 논란에 대한 대중의 반응 역시 감정적이고 격렬했다. 군 관계자는 “군에 이성적(理性的)으로 대처할 충분한 시간을 주지 않고 여론의 불을 일단 끄라는 식으로만 압박했던 것은 아쉬운 점”이라면서도 “그만큼 그간 쌓인 군에 대한 불신이 컸던 것 같아 씁쓸할 뿐”이라고 했다. 전방의 한 지휘관은 “SNS 등에 알려진 일부 자극적인 사례가 전부라면 군은 진작에 망했을 것”이라고 했다.
군의 잇단 성추행 사건과 관련해선 말기 암(癌) 수준으로 퍼진 법무관 중심의 군 사법 체계 수술을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고(故) 이예람 중사를 비롯, 상급자에 의한 피해를 호소하다 회유·무마·협박·따돌림 등으로 2차 가해를 입고 극단 선택을 하는 사례가 판박이처럼 속출하는데도 같은 조직의 법무관들이 수사·기소·판결 업무를 독점하며 끼리끼리 봐주기를 한다는 비판이다. 실제 문재인 대통령이 이 중사 죽음에 대해 ‘격노’하며 엄정 수사를 지시했음에도 지휘부는 단 한 명도 기소되지 않았다.
◇”시뮬레이션 훈련 임계치 다가와”
더 큰 문제는 1년 내내 기강 문제 수습에 허덕이는 동안 군의 존재 이유인 국방·안보에는 구멍이 뚫렸다는 것이다. 한 육군 대령은 “한미 연합 대비 태세가 본격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 군의 근본적 위기”라고 했다. 대규모 실기동 야외 훈련(FTX)은 2018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컴퓨터 시뮬레이션 훈련으로 대체됐다. 지난 8월 연합 훈련도 종전보다 12분의 1 규모로 축소 실시됐다. 한미연합사령부 사정에 밝은 한 군 소식통은 “2021년 현 시점까지는 그럭저럭 준비 태세를 유지해왔다”면서도 “이런 상황이 앞으로 수년만 지속되면 동맹의 근간이 흔들릴 것”이라고 했다. 시뮬레이션으로 흉내만 내는 훈련의 임계치가 다가오고 있다는 말이다.
올해 전·현직 주한미군사령관들은 지속적으로 실전 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주한미군이 한미 동맹에 품은 애착이 그만큼 크기 때문에 ‘쓴소리’를 계속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연합 대비 태세가 무너지는 상황의 위험성을 한국보다 미국이 더 예민하게 감지했다는 것이다. 특히 미군은 연합 훈련을 경험해본 한미 장교들 숫자가 줄어드는 점을 심각하게 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군 관계자는 “1년 6개월 복무하고 전역하는 병사들이야 그렇다 쳐도, 직업 군인들의 훈련 밀접도가 떨어지고 있는 점은 우려스럽다”고 했다.
◇'땜질 대책’으론 더 큰 대가 치를 것
군은 4차 산업혁명 흐름에 맞춘 스마트 강군(强軍) 청사진을 현 난관의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부실 급식 원인이었던 취사병 혹사를 로봇을 투입해 해결하고, 신형 전투 장비를 보급해 개인 전투력을 증강시키는 ‘워리어 플랫폼’으로 병력 감소에 대처하겠다는 것이다. 북한의 핵·미사일 전력 증강에 대해서도 기존의 작계 5015를 대폭 수정 보완하고, 현무4 등 게임체인저급 신무기 개발로 맞선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이 같은 군의 대처가 또 ‘사후 땜질’로 그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한국국방안보포럼 신종우 사무국장은 “인구구조 변화, 세대 문화 갈등 같은 요소는 이미 10여 년 전부터 충분히 예측하고 있었다”며 “그런데도 국가와 군의 미래엔 관심이 없고 자신의 진급과 정치권 줄 대기에 급급했던 고위 장성들의 외면 탓에 한 번에 터져버린 것”이라고 했다. 올해 발생한 부실 급식, 성추행 논란 역시 일회성으로 ‘대충 덮기’ 식으로 넘어간다면 조만간 또 큰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재명 “선택적 모병제로” 윤석열 “軍경력 혜택 늘릴 것”]
올 들어 창군(創軍) 이래 최대 위기를 맞았다는 지적까지 나오는 군(軍). 여야(與野) 대통령 후보들도 기존 징병제 위주의 병력 구조를 본질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보고 관련 공약을 제시하고 있다. 후보들은 20대 남성과 부모 세대 표심을 잡기 위해 월급과 전역 후 각종 지원 등 복지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선택적 모병제’를 국방 공약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이 후보는 지난 10월 국군의날을 맞아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를 유지하면서도 병역 대상자가 단기간 복무하는 징집병과 중기 복무하는 전투부사관 중 선택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현재 군이 운용하는 전문하사(임기제 부사관)제를 더욱 확대하겠다는 취지로 해석됐다.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는 군 경력에 대한 혜택을 늘리겠다고 공약했다. 군 복무로 여성에 비해 역(逆)차별을 받고 있다는 피해 의식이 큰 20대 남성을 겨냥한 전략이다. 그는 “군 복무 경력을 인정하도록 법제화를 추진하겠다”며 “현역병의 국민연금 가입 기간을 18개월로 확대하고, 군 생활 안전보장보험 가입을 적용하겠다”고 했다. 다만 윤 후보는 모병제에 대해선 “장기적으로 20년 정도 지나면 가야 하지 않을까”라며 “징병제·모병제를 혼합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정의당 심상정 후보는 모병제에 가장 적극적이다. 그는 “1단계로 의무 복무 12개월의 징집병과 의무 복무 4년의 전문병사를 혼합 운용하는 징·모병 혼합제를 2029년까지 운영하겠다”고 했다. 해군·해병대, 공군은 2025년까지 완전 모병제로 전환하고, 육군은 2029년까지 모병제로 전환하겠다는 것이 심 후보 공약이다. 병사 월급을 최저임금 수준으로 올리겠다고도 했다.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는 준(準)모병제와 군 전역 시 1000만원 지급 공약을 내세웠다. 임기제 부사관을 군 병력 50%까지 확대하고 일반병 숫자를 줄이겠다는 것이다. 안 후보는 “군 복무를 마치고 학교로 복학하거나 취업·창업 등을 위해 사회로 나가는 전역 청년들에게 1000만원을 사회진출지원금으로 지급하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