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출범 11개월을 넘겼다. 김진욱 공수처장은 “고위 공직자 범죄를 척결해 국가의 투명성을 높이겠다”고 했지만, 지금까지 성적표는 참담한 수준이다. 고위 공직자 범죄를 공수처가 독자적으로 적발한 실적이 한 건도 없다. 고소, 고발 등으로만 2700건 이상의 사건을 접수해 놓고 직접 수사에 착수한 것은 겨우 24건, 전체의 1%도 안 된다. 수사를 했다지만 구속하거나 기소한 실적이 전혀 없다. 오히려 수사하는 사건마다 정권 봐주기, 야당 표적 수사, 언론과 민간인 사찰, 불법 압수 수색, 피의자 권리 침해 등 논란만 일으키고 있다. 공수처 폐지론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검사를 거쳐 기업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법조인은 “어느 조직이든 핵심 성과 지표(KPI)에서 낙제점을 줄줄이 받고 있다면 구조적 문제가 있다는 진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고 한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통신 자료 조회 논란이 확산하는 가운데 김진욱 공수처장이 23일 오전 정부과천청사 공수처로 출근하고 있다./연합뉴스

◇사건 28% 분류도 못 한 채 방치

공수처의 수사 부진은 사건 접수·분류 단계부터 시작한다. 검찰, 경찰 등 다른 수사기관과 달리 공수처는 사건이 접수되면 수사 여부를 판단하는 별도 절차를 두고 있다. 모든 사건에 대해 담당 검사가 분석·검토 보고서를 올리면 공수처장이 수사 여부를 최종 결정하게 돼 있다. 이 과정에서 시간이 많이 걸릴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공수처에 접수된 사건 2707건 중에 입건, 불입건, 이첩 등 처리 방향이 결정된 것은 1951건(72%)에 그쳤다. 이런 분류조차 못 한 사건이 756건(28%)이나 된다. 검찰, 경찰과 비교조차 안 된다. 작년 검찰은 접수한 사건 239만7832건 중에 92%를 기소, 불기소, 이송 등으로 처리했고 미결은 8%에 그쳤다. 경찰도 작년에 발생 범죄 158만7866건 가운데 81%를 검거했다.

공수처가 사건 분류조차 제때 못 하면서 ‘분석 중’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채 사실상 방치되고 있는 사건도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지난 10월 596건으로 이미 전체 사건의 25%를 넘어섰다. 이후 11월 663건(26%), 12월 756건(28%) 등 건수와 비율이 점점 커지고 있다. 공수처가 출범 첫해부터 이런 식으로 미결 사건을 쌓아간다면 장기적으로 미제 사건도 누적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검찰 간부 출신 변호사는 “모든 사건에 대해 공수처장이 수사 개시 여부를 결정하는 구조는 수사 효율성뿐 아니라 공정성에도 시비가 생길 수 있다”면서 “공수처가 사건 처리는 제때 못 하면서 야당 대선 후보만 수사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는 것도 당연하다”고 했다.

공수처 사건 접수·처리 현황

◇공수처 기소 0건 vs 순천지청 1만1438건

공수처의 수사 성과가 거의 없는 이유를 조직 규모가 작다는 데서 찾기도 한다. 김진욱 공수처장도 “공수처는 순천지청 사이즈”라며 “사건을 다 수사할 수는 없다”고 했다. 과연 그럴까?

공수처는 김 처장과 여운국 차장을 포함해 검사 23명을 두고 있다. 검찰 광주지검 산하 순천지청(검사 29명)과 비슷한 크기다. 김 처장이 말한 대로라면 순천지청이 처리한 사건 수도 공수처와 큰 차이가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작년 순천지청은 2만1867건을 수사해 1만1438건을 기소, 나머지 1만429건을 불기소했다. 반면 공수처는 올해 24건만 수사하는 데 그쳤다.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의 특혜 채용 사건만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넘겼을 뿐 나머지 사건에서는 한 건도 기소하지 못했다. 순천지청장 출신 김종민 변호사는 “검찰 형사부 소속 검사들이 한 달에 많게는 300건까지 처리하는 것과 비교하면 공수처의 사건 처리 속도는 너무 느리다”고 했다.

공수처의 근본적 문제는 고위 공직자 범죄를 독자적으로 적발하는 ‘인지 사건’이 한 건도 없다는 것이다. 고소, 고발 등에만 의존하는 ‘천수답’식 수사로는 ‘살아 있는 권력’의 부패 범죄를 잡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특수부 검사 출신 변호사는 “공수처가 1년이 다 되도록 정권에 불리한 사건은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알려고 하지도 않는 것 같다”고 했다.

◇“공수처 담당하는 특검 설치해야”

참여연대 공익법센터 소장 출신 양홍석 변호사는 “공수처 사건을 담당하는 특검을 설치해야 한다”면서 “기소든 불기소든 공수처가 한 수사를 믿을 수가 없지 않은가”라고 했다. 공수처 수사가 정치 편향, 불법·부실 등 논란을 빚으면서 나온 말이다.

공수처가 지금까지 입건한 사건은 모두 24건이지만, 같은 사건을 혐의나 당사자 별로 나눠놓은 게 있어 실제 수사 사건은 12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4건이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 관련이다. 수사 대상인 고위 공직자가 7100명이나 되는데 야당 후보 한 사람만 쫓아다니는 격이다. 그러면서 대장동 의혹은 검찰에 맡기고 손도 대지 않는다. 공수처 2인자인 여운국 차장은 “대장동은 한낱 경제 범죄에 지나지 않지만 고발 사주는 대장동보다 훨씬 중요한 범죄”라고도 했다.

최근에는 공수처가 언론과 민간인의 휴대전화를 염탐한다는 불법 사찰 의혹도 터졌다. TV조선 기자는 본인뿐 아니라 어머니, 여동생까지 공수처가 영장도 없이 이름, 주민등록 번호, 주소 등 개인 정보를 캐냈다. 가정 주부이거나 회사원인 가족의 정보를 캐려면 기자 본인의 휴대전화에 대한 영장을 받아 통화 내역 전체를 알아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 TV조선 기자가 공수처의 ‘황제 조사’ 장면을 특종 보도했고, 이후 공수처가 TV조선 보도 경위를 내사했다는 점에서 비판 언론에 대한 보복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된다 . 지금까지 공수처의 전화 염탐을 당한 언론사가 17곳, 기자가 102명에 이른다. 이 숫자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공수처는 이른바 ‘고발 사주’ 의혹 수사에서, 손준성 검사에 대한 영장을 잇달아 기각당하면서 기본적 수사 능력조차 의심받기도 했다. 손 검사의 공범이라며 상급 검찰 간부들을 지목했지만 그들의 소속 부서나 직급조차 내놓지 못했다. 그냥 ‘성명 불상’이라고 했다. 손 검사가 범행했다는 시기 그의 상관이던 대검차장 이름까지 틀렸다고 한다. 여운국 차장은 법정에서 본인 입으로 “공수처는 아마추어”라고도 했다. 공수처가 김웅 국민의힘 의원 사무실 등을 압수 수색하면서 영장도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 바람에 법원에서 ‘위법’ 판정을 받기도 했다. 법조계에서는 “대법원 판례로 확립된 원칙인데 공수처 검사와 수사관들은 이런 내용도 모르고 있었나”라는 말이 나왔다.

◇“공수처 폐지? 민주당 국회에선 힘들 것”

공수처는 내년 예산으로 200억원을 배정받았다. 정부가 180억원만 신청했는데도, 국회 다수 의석을 가진 민주당이 20억원을 더 얹어준 것이다. 공수처는 이 돈으로 한 해 동안 45건을 수사하겠다고 한다. 정치권과 법조계에서 ‘공수처 폐지론’까지 나오고 있지만, 실현 가능성은 크지 않다. 국회 관계자는 “공수처를 폐지하려면 국회가 관련 법안을 통과시켜야 한다”면서 “공수처를 만든 민주당이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대선에서 정권이 바뀌더라도 공수처 폐지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싱가포르, 한 해 352건 접수해 105건 수사… 총리의 최측근 현직 장관 기소·처벌하기도]

정부와 여당은 작년 12월 야당의 반대에도 공수처 설립을 강행하면서 싱가포르 부패행위조사국(CPIB), 홍콩 염정공서(ICAC) 등 해외 반부패 수사 기관을 성공 모델로 삼겠다고 했다. 홍콩 염정공서와 싱가포르 부패행위조사국은 부패 범죄에 대한 수사, 기소와 유죄 입증에서 한국 공수처는 비교도 못 할 정도로 높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싱가포르 부패행위조사국은 1952년 출범 이후 ‘부패와의 전쟁을 신속·확실하게 수행한다’는 목표에 따라 활동하고 있다. 공공 부문뿐 아니라 민간 부문의 부패까지 조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공공과 민간이 모두 청렴해야 외국 기업과 거래와 투자가 촉진돼 국가 경제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건 관련 보고는 총리에게만 하며 다른 기관의 간섭을 받지 않는 방식으로 독립성이 보장돼 있다. 총리의 최측근이나 친구인 현직 장관들도 부패행위조사국이 기소하거나 처벌한 사례가 있다. 부패행위조사국은 최근 5년간 연평균 352건의 부패 사건을 접수해 105건을 수사했다. 혐의가 확인돼 재판에 넘겨진 사건에서 유죄 판결이 나오는 비율은 97% 이상이라고 한다.

홍콩 염정공서는 1974년 당시 퇴직을 앞둔 경찰 간부가 거액을 축재한 의혹에 대해 학생들이 연일 시위를 벌이며 부패 척결을 요구한 게 설립 계기가 됐다. 정부, 공기업뿐 아니라 민간의 뇌물 등 부패 범죄와 선거 범죄를 염정공서가 전담한다. 잠입 수사, 위장 수사, 제보자 보호 등 다양한 수사 기법을 동원해 범죄 적발에 성과를 거두고 있다. 도널드 창 전 행정장관의 뇌물 혐의를 4년간 수사한 끝에 징역형을 받아내 주목받기도 했다. 염정공서는 작년 한 해에만 91건을 수사해 154명을 기소했고, 이 가운데 110명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았다고 한다.

홍콩과 싱가포르는 국제투명성기구가 해마다 발표하는 국가청렴도(CPI) 조사에서 최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작년에도 싱가포르는 3위, 홍콩은 11위에 각각 올랐다. 한국은 33위로 큰 격차를 보였다. 홍콩과 싱가포르의 국가청렴도가 높은 데에는 염정공서, 부패행위조사국 등 반부패 수사 기관의 역할이 큰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