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3월을 시작으로 연내 4차례 이상 금리를 인상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면서 한국 경제에는 ‘퍼펙트스톰’이 닥칠 수 있다는 경고음이 잦아졌다. 두 개 이상의 잠재적 위험요인이 한꺼번에 현실화되면서 시장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자본 유출을 막기 위해서는 한국은행도 금리 수준을 연준과 비슷하게 올려나가야 하는데, 이때 과연 금리 인상에 따른 결과를 한국 경제가 견딜 수 있을 만큼 튼튼한지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가계·기업·국가 부채가 급속도로 증가하고, 거대한 규모의 부동산과 금융시장 불안정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별다른 성장 대책 없이 금리를 인상하게 되면 심각한 경제위기가 올 수도 있다고 계속 지적해왔다.
이필상(75)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특임교수도 그런 전문가 중 한 명이다. 지난 1월 25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연구실에서 만난 이 교수는 두 시간 가까이 인터뷰를 하는 동안, 한국 경제가 지금 얼마나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끊임없이 강조했다.
“지금 한국 경제는 펌프가 고장 난 우물이라고 보면 된다. 성장 동력인 펌프가 고장 났는데, 고칠 생각은 안 하고 지난 5년간 마중물만 부어왔다. 그러니 돈이 산업계로 제대로 돌지도 못하고 일회성 소비로 끝난 거다. 아니면 부동산 및 금융 시장으로 돈이 흘러들어 갔거나. 부동자금도 대단히 많아진 상황이다. 그런데 지금 잠재성장률을 높일 대책도 없이 금리만 올리면 부동산·채권 가격이 대책 없이 떨어지고 정말 위기가 올 수 있다. 물가는 물가대로 오르고 경제는 주저앉으면서 실업자가 쏟아져나오는, ‘퍼펙트스톰’ 상황이 일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거다.”
그렇다면 대선을 한 달 남짓 앞둔 지금, 거대 양당의 대선후보들은 지금의 이 위태로운 경제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을까. 이 교수는 “경제를 살려놔야 하는 시점에서 일단 돈을 풀고 보자는 얘기만 나온다”며 “대선 국면에 내놓은 공약 중에서도 체계적으로 준비했다고 할 만한 성장 정책이 단 한 개도 없다”고 평가했다.
“나중에 약속을 지켰든 안 지켰든, 매 선거 때마다 후보들은 ‘날 뽑아주면 경제 이렇게 살리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은 ‘날 뽑아주면 얼마 얼마 주겠다’는 얘기만 나온다. 코로나19 손실보상금이라고 해서 50조원이고 100조원이고 나눠준다 하고, 탈모 건강보험료까지 지원해준다 한다. 그러면서 또 종부세, 증권거래세 등 세금은 깎아준단다. 세금은 적게 걷으면서 무슨 돈으로 퍼줄 건가. 여당이고 야당이고 할 것 없이 완전히 포퓰리즘 경쟁이다. 이런 퍼주기 경쟁만 하다가 선거 끝나면 나라가 빚더미에 앉게 될까 봐 불안하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원년 멤버로 시작해 30여년간 시민운동에 몸담으며 학자로서 역대 정부의 경제 정책과 공약을 감시해온 이 교수지만, 이번 대선 국면에 대해서는 “이렇게까지 선심성 공약만 늘어놓는 선거는 처음이라 겁이 날 지경”이라고 말했다.
“여야 모두 완전 포퓰리즘 경쟁”
특히 이 교수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의 기본소득에 대해서는 “소득주도성장 다시 하겠다는 얘기”라고 일축했다. 이 후보는 기본소득을 복지 차원이 아닌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한 정책으로 강조해왔다. 이 교수는 “기본소득을 줘서 소비를 촉진하고 그다음에 투자가 활성화되고 경제가 살아난다는 논리는 소득주도성장이랑 똑같다”며 “펌프가 고장 나서 물도 안 나오는 상황에서 성장을 얘기하려면 기본소득을 그렇게 함부로 얘기하면 안 된다”고 비판했다.
이재명 후보는 “기본소득 정책도 국민이 끝까지 반대해 임기 안에 동의를 받지 못하면 추진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구체적인 대상과 금액을 한정한 기본소득 개념의 공약들을 꾸준히 발표해왔다. 예컨대 △2023년부터 청년 기본소득 연 100만원 지급 △내년부터 보편적 국민소득 연 25만원 전 국민 지급 등이다.
전 국민 대상 기본소득은 아니지만,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 역시 돈을 더 풀겠다는 약속을 계속해온 것은 마찬가지다. 50조원 이상의 코로나 손실보상, 코로나 임대료나눔제 50조원, 부모급여 신설, 기초연금 인상 등이 대표적이다.
이 교수는 이처럼 ‘지원은 늘리고 세금은 줄이는’ 선심성 약속들을 ‘4무(無) 공약’이라고 불렀다. ‘무제한, 무감각, 무차별, 무조건’으로 돈을 주겠다는 내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연령·계층·집단 가리지 않고 지원금을 주고 주택, 금융 혜택을 주겠다고 하는데, 또 뒤돌아서면 종부세·양도세·소득세 등 세금 깎아준다고 한다”며 “실현 가능성도 없는데 표만 되면 아무 말이나 한다는 점에서 ‘4무 공약’”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우리 경제가 여러 군데에서 굉장히 많이 망가졌는데 이를 제대로 반성하거나 평가하거나 제대로 된 대안을 제시하는 후보가 없다”고 말했다.
관련 공약 내용은 없고 미사여구만
이 교수는 가장 시급한 과제인 ‘성장 동력 마련’ 관련 공약이 터무니없이 부실한 점도 지적했다. 금리가 올라가고 부동산, 증권시장이 불안정해져도 국민 소득이 탄탄하게 뒷받침된다면 충격을 줄일 수 있는데, 다음달 3월 집권당으로 거듭날 가능성이 큰 거대 양당 중 한 곳도 제대로 된 공약을 내놓지 못했다는 것이 이 교수의 평가다.
이재명 후보는 경제성장 관련 공약으로 ‘수출 1조달러, 국민소득 5만달러, 글로벌 G5’를 내걸었다. 이와 관련해 △스마트공장 보급 확대 △인공지능 기술을 바탕으로 한 산업 전반의 디지털 대전환 △반도체, 미래 모빌리티, 바이오헬스 등 5대 슈퍼클러스터 조성 △메타버스 등 이머징 5 신산업 프로젝트 추진 등의 계획을 선보였다. 윤석열 후보의 성장 공약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인공지능 산업 육성과 차세대 반도체 산업 육성 등을 위해 △반도체 및 지원기술 인력 10만명 양성 △디지털영재학교 설립 및 미래기술 지원 확대 등을 동원하겠다는 내용이다. 비슷비슷한 거대 양당 후보들의 이런 성장 공약에 대해 이 교수는 “미사여구만 늘어놓고 희망사항을 얘기한 것뿐”이라며 “어떤 문제에 대한 대안인지조차 없을 뿐더러 재원은 어떻게 조달할 것인지 등 방법론이 전혀 없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문재인 정부가 핵심 경제정책으로 소득주도성장을 시행하면서 우리 경제 저변이 부실해졌다”는 점을 수차례 강조했다. “기업의 투자, 산업 활성화 수단으로는 돈이 안 도는데도 빚을 내 돈을 계속 쏟아부어서 국가부채만 늘어났다. 그런 가운데 최저임금 올리고 주 52시간제를 시행해 자영업자, 중소기업들이 힘들어지면서 양극화가 심화하고 실업자가 늘어났다. 경제가 수용할 능력이 없는데 정책을 밀어붙이니 시장경제가 발작한 셈이다. 지금은 일부 대기업들이 수출을 잘해서 그런대로 경제가 버티는 상황이다. 국제 경쟁력을 유지할 만한 미래 산업도 불투명한 데다가 국가 빚까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늘어났으니 여러 요인이 불안한 상황이다.”
“文 정부 5년간 우리 경제 부실해졌다”
이 교수는 문재인 정부의 최대 실정이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는 국가 부채’라고 지적했다. 지난 5년 동안 한국은 나랏빚이 400조원 이상 늘어났고, 총 1000조원 이상의 빚을 졌다. 1인당 국가채무는 2016년 1200만원 수준이었다가 2022년 2081만원까지 오를 예정이다. 2017년 36%였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2022년 50~50.5%까지 오른다. 빠르게 증가한 나랏빚에 대한 경고가 이어졌지만, 정부는 ‘주요국의 국내총생산 대비 국가채무비율보다 낮기 때문에 재정건전성은 양호하다’는 입장을 5년째 고수해왔다. 국가채무 상황에 대한 대선후보의 인식도 정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재명 후보는 한 술 더 떠 “국가채무비율이 100%를 넘겨도 아무 문제 없다”고 발언했고, 윤석열 후보도 빚을 더 져서라도 복지 체계를 더 강화하겠다는 내용의 공약을 연일 발표했다.
정치권의 이러한 재정건전성 인식에 대해 이 교수는 “국가재정이 불안한 상태인 것은 사실”이라면서 ‘안이한 인식’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국가신인도가 떨어져서 부도 위기에 처하는 것은 국가부채의 규모, 수준과는 상관없다”며 “얼마나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지가 더 중요하다”라고 했다. 이 교수는 1997년 IMF 외환위기를 예로 들며 “외환위기 당시인 1997년 국가채무비율은 11.4%밖에 안됐는데도, 국가신인도가 떨어지니 기업들이 무너지고 외국 자본이 대거 빠지면서 위기가 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절대적인 비율보다도 국가채무를 견뎌낼 수 있을지에 대한 신용이 더 중요한데, 현재 한국의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경제성장률은 점점 떨어지고 경제 체질도 부실해지는데 국가채무가 빠르게 늘면 대외 신용도가 좋아질 수 있겠느냐”고 했다. 결국 경제성장률이 탄탄하게 뒷받침되지 않으면 국가채무비율이 상대적으로 낮다 해도 위기가 올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가장 시급한 문제는 성장 동력을 찾는 일이다. 지난해 11월 OECD가 발표한 재정 전망 보고서는 한국의 1인당 잠재 국내총생산 성장률이 2030년부터 약 30년간 0%대로 떨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OECD가 집계한 38개국 중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이 교수는 “성장률을 높이고 국민소득을 늘리게 되면, 지금 가장 큰 부담으로 꼽히는 연금 개혁도 자연스럽게 가능하다”며 “현행 9%인 보험료율을 그대로 유지해도 보험료가 많이 걷히고, 소득대체율을 40%로 유지해도 은퇴 후에 받는 금액이 많아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1997년에 외환위기가 닥쳤을 때, 2008년에 세계금융위기가 왔을 때 사람들은 ‘그게 뭐 대수냐’고 생각했다. 그런데 닥치고 나서야 보통 큰 위험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지금 우리 경제 구조는 그때와 비슷하다.
이런 위험이 목전인데 지금 대선 국면에서 선심성 경쟁만 하고 있으니 국가 부도가 현실화될 위험성은 점점 커지고 있다. 연금 개혁같이 꼭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도 아주 지엽적이고 말단적인 정책만 나오고 있다. 후보들 다 정신 차려야 한다. 얼마나 줄 건지가 아니라 어떻게 더 잘살게 해줄 것인지에 대한 얘기가 선거 과정에서 제대로 나와야 한다. 토론도 벌여 당장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