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의 이번 한미 정상회담은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 대통령의 방미 중 최고 성과를 얻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2년 만의 국빈 방문이라는 형식을 넘어 북핵에 맞서기 위한 한미의 ‘워싱턴 선언’을 이끌어 냈다. 비확산조약(NPT)이라는 국제사회의 룰을 지키면서 구두에 그쳤던 미국의 핵우산을 명문화해 한 단계 업그레이드했다. 우크라이나와 대만 문제에 대해서도 러시아와 중국을 직접 거론하지 않으며 민주 진영의 확고한 원칙을 확인했다. 한미 동맹을 글로벌 가치 동맹으로 격상했다는 점에서 서방 외교가도 성공적이라며 주목하고 있다. 한국의 야당과 중·러 정도가 비판적이다. 윤 대통령의 상·하원 연설과 만찬 노래는 지도자의 품위와 외교적 매너라는 측면에서 세계적 찬사를 받았다. 일본 TBS뉴스는 “윤 대통령의 노래가 세계를 놀라게 했다”며 “의회 연설에서 26번의 기립 박수를 받았다”고 보도했다. 굴욕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던 대일(對日) 외교에서도 점차 주도권이 한국으로 넘어오고 있다. 일본은 화이트리스트(수출 우대 심사국) 복원에 나섰고, 기시다 후미오 총리도 6~7월로 예상됐던 방한을 5월 7~8일로 서두르고 있다.
그러나 30일 귀국한 윤 대통령을 기다리는 건 가시밭 같은 국내 상황이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윤 대통령이 미국에선 환대를 받았지만 국내에선 다른 분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제는 내정(內政)의 시간이다. 윤 대통령이 외교적 성과를 기반으로 야당과 만나고 국정의 난맥을 풀며 내정에서도 주도권을 가져올 적기인 셈이다.
정치는 거대 야당의 폭주와 대립으로 출구를 못 찾고 있다. 경제는 무역 적자와 수출 부진 등 어느 것 하나 만만치 않다. 정치 양극화와 가짜 뉴스를 방치할 경우 경제와 국가 경쟁력 모두를 갉아먹게 된다. 한·미·일(韓美日)의 결속이 강화된 만큼 틈이 벌어진 중·러 관계도 연착륙시켜야 한다. 외교 성과를 침식하는 대통령의 낮은 지지율을 회복하지 않으면 국정 동력을 잃는다. 원로들과 전문가들은 윤 대통령에게 경제와 정치, 그리고 리더십과 스타일에서의 변화와 혁신을 요구했다.
◇경제와 민생에 집중
황우여 전 새누리당 대표는 “지난 1년 외교와 안보에서 큰 틀을 잡았다면 이제 1년은 전적으로 경제와 민생을 돌봐야 한다”며 “규제 개혁을 가시적으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선 정부와 여당, 대통령실의 정책 조율과 리더십을 강조했다. 국민의힘은 최근 새로운 지도부가 출범하며 그동안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정책 조율 강화에 나섰다. 전세 사기와 주 69시간 논란을 빚은 노동 개혁 등 민생 문제에서 속도를 내고 있지만 좀처럼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황 전 대표는 “민심이 무엇을 아쉬워하는지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민생 현장의 목소리를 많이 듣고 이를 정책에 빠른 속도로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직 국무위원은 “대통령이 참모는 물론 특히 젊은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미국 뉴욕타임스도 일자리 문제로 분투 중인 젊은 세대에게 ‘워싱턴 선언’의 성과가 미흡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국내 전문가의 지적을 소개했다.
수출 부진과 무역수지 적자, 이에 따른 원화 약세에 대한 대비책도 세워야 한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한미 금리 역전, 반도체 수출 악화 등이 겹치며 외환 시장이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있다”며 “대통령이 귀국 후 경제 정책에서 적극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포퓰리즘 선 긋기
윤 대통령은 대선 때 미래 세대를 착취하는 포퓰리즘과의 결별을 약속했다. 그러나 국민의힘은 최근 민주당과 함께 사회간접자본(SOC) 공사 등을 쉽게 만드는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기준 완화 법안을 처리하려 했고, 재정을 건전하게 관리하기 위한 재정 준칙은 외면했다. 한국국제경제학회장을 지낸 김태준 국가교육위 상임위원은 “지난 정부에선 필요한 부분에다 돈을 쓰기보다는 선거용 포퓰리즘 지출이 많았다”며 “재정 지출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고 저출산 등 국가적 과제에 예산을 집중해야 한다”고 했다.
전기 요금 인상 지체로 인한 한국전력의 계속된 채권 발행은 채권시장 전체에 악영향을 주는 단계로 가고 있지만 정부는 전기 요금 인상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여권 핵심 관계자는 “낮은 지지율에 전기 요금까지 인상할 경우 총선이 어렵다”고 말했다. 내년 만기 국채가 92조원이고, 국가 부채 이자로 지불해야 될 액수만 25조원을 웃도는 상황이다. 지금 당장 여론의 비난을 감수하더라도 전기 요금 인상 같은 결단으로 재정 포퓰리즘과는 선을 그어야 한다. 최광 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대통령이 외교에서처럼 전기 요금 인상, (유류세 등) 세금 문제에서도 국민을 설득하고 결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치 양극화 해소와 국민 통합
민주당은 방미 기간 간호법, 방송법 등을 단독 처리하며 폭주했지만 여당은 이를 막지 못했다. 정권 교체 1년이 되도록 주도권이 야권에 있는 상황이다. 지금이야말로 윤 대통령이 외교 성과 공유를 위해 야당과 접촉하며 내정 주도권도 가져올 적기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문희상 전 국회의장은 “대통령이 외교 성과를 공유하기 위해서라도 이번에는 야당에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며 “안보와 경제가 100점이라도 곱셈에 해당하는 통합이 0점이면 결국 0점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대장동 등 다수의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민주당 이재명 대표와의 만남이 여의치 않은 것도 현실이다. 유흥수 전 주일 대사는 “이재명 대표를 당장 만나는 것이 여권 지지층의 동의를 얻기 어려울 수 있다”며 “그렇다면 이번에 선출된 여야 원내 지도부에 손을 내밀어 ‘국회에서 잘 도와달라’고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직 국무총리는 “사회 갈등 해소와 국민 통합에 더 신경 쓰고, 과도한 편 가르기로 실패한 지난 정부의 실수를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인사(人事)도 능력과 함께 다양성 등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야 하는 과제가 남게 됐다.
◇가짜 뉴스와의 투쟁
윤 대통령은 하버드대 연설에서 “허위 선동과 거짓 뉴스가 디지털, 모바일과 결합해서 진실과 여론을 왜곡하는 일이 다반사가 되었다”며 “거짓 선동과 가짜 뉴스라는 반지성주의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위기에 빠뜨린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의 가짜 뉴스, 선동에 대한 비판은 미국은 물론 국제사회의 민주 진영 전체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미국과 유럽 정부도 가짜 뉴스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대대적 규제에 나섰고, 언론계도 가짜 뉴스와 관련된 유력 언론인을 퇴출하는 등 자정에 나서고 있다.
윤 대통령은 가짜 뉴스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거짓으로 판명 난 청담동 술자리 의혹에 대해 야당은 아직도 정정이나 사과를 하지 않았고, 방미 기간에도 대통령이 화동(花童)에게 입맞춤한 것을 ‘성적 학대’라고 비난했다. 유흥수 전 대사는 “야권발 가짜 뉴스와 선전 선동이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에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라며 “가짜 뉴스를 바로잡는 한편 파격적이고 적극적인 홍보 방법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겸손과 절제의 리더십
원로들은 윤 대통령의 지지율 회복을 위한 리더십의 변화를 한목소리로 요구했다. 윤 대통령은 이번 방미 기간 따뜻한 미소와 상대를 배려하는 매너, 겸손한 말투와 태도로 극찬을 받았다. 한미 정상회담을 성공시켜야 한다는 절박함이 변화를 이끌어 낸 것이다. 소설가 이문열씨는 “말은 하는 사람의 진의와 관계 없이 듣는 사람과 상황에 따라 가변성을 갖는다”며 “표현이 강렬한 것은 좋지만 잘못하면 이상하게 과장돼 왜곡되는 빌미를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유흥수 전 대사는 “외교적으로 옳은 발언이라도 국민 정서를 감안해 표현을 정제해야 한다”고 했다. 전직 외교관은 “자신감을 갖게 되면 발언이 길어지는데 이제는 조금 절제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직 총리는 “대통령의 애국심이라든지 사심(私心) 없이 하고자 하는 뜻은 국민이 안다”며 “조금만 더 신중하고 겸손한 자세로 접근하면 국민들이 평가할 것”이라고 했다.
김건희 여사는 이번 방미 중 외교 성과를 빛내는 조연 역할을 했다. 그러나 “남편이 대통령이 되더라도 아내의 역할에만 충실하겠다”고 했던 김 여사의 과거 발언과 지금 활동이 서로 충돌한다는 비판도 계속되고 있다. 문희상 전 의장은 “대통령 부인이 공식 활동을 통해 소임을 다하는 것은 박수받을 일”이라며 “제2부속실 등 제도화를 통해 관리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제 대통령 부인의 활동을 공식화하고 대통령실이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야 불필요한 논란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