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가 지난 11월 28일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연대와 공생’ 주최‘대한민국, 위기를 넘어 새로운 길로’ 학술포럼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친이낙연계 싱크탱크 ‘연대와 공생’의 정형호 조직위원장은 지난 11월 1일 서울 동작구 서울여성플라자에서 시민모임 ‘민주주의실천행동’이 개최한 ‘헤어지자 용산·개딸 전체주의’ 토론회 당시 “내가 NY(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를 지칭)를 찾아갔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찾아가서 ‘깃발을 들어주십쇼. 신당을 해야 합니다. 지금 NY는 이재명 당에 가서 숨 쉴 공간이 1도, 아니 0도 없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NY는 아주 치밀하게 첫째, 둘째, 셋째, 넷째, 다섯째까지 거론하면서 안 되는 이유를 이야기하더라.”

정 위원장의 발언은 토론회 사회를 맡았던 이 전 대표 대선 캠프 소속이었던 김효은 전 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 대변인의 제지로 중단됐지만, 그는 이후에도 “발기인 준비까지 다 해놨다” “행동하는 양심가들로서 지금 바로 행동에 옮겨야 할 시간이다” “새로운 당을 만드는 일에 우리가 나서야 한다”며 신당 필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이날 토론회는 ‘한국 정치의 문제’ 등을 주제로 한 기조발표 후 참석자 전원이 토론하는 식으로 진행됐는데, 전원 토론 내용은 기조 발표와 달리 온라인상에 중계되지 않았다. 정 위원장의 이 같은 발언은 현장의 기자들이 모두 물러난 뒤 전원 토론 도중 나왔다.

문제는 명분·타이밍·조직력·공간…

이 전 대표는 여전히 신당 창당에 대해 선을 긋고 있지만, 정 위원장의 발언처럼 그의 주변에선 신당 창당 필요성이 적지 않게 제기되는 분위기다. 지금의 이재명 대표와 친명계가 이끄는 민주당이 과거부터 당이 고수해 온 정통 가치, 정체성을 상실한 지 오래라는 것이 창당 이야기가 나오는 주된 배경이다. 친이낙연계 인사들 사이에선 심지어 지금의 민주당을 과거 ‘고려’, 이 전 대표를 ‘이성계’에 빗대기도 한다. 당이 내부적으로 혁신하기 어려울 만큼 곪았고 과거 조선 건국의 시발점이 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수준의 강도 높은 액션이 필요하다는 의미에서다.

민주당 인사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앞서 이 전 대표와 정 위원장과의 대화에서 신당 창당 반대 이유로는 ‘대의명분’ ‘타이밍’ ‘조직력’ ‘공간’ 등이 지적됐다고 한다. 지난 대선 이후 이재명 대표와 친명계의 독선이 지속되고 있지만 그렇다고 당을 탈당할 만큼의 ‘명분’이 형성되지 않았거니와 내년 총선을 고려했을 때 그 ‘시기’도 적절치 않다는 판단이 앞서고 있다는 이야기다. 더군다나 당 안팎에서 창당을 지원할 ‘인사’, 그리고 이들이 응집돼 활동할 수 있는 물리적 ‘공간’ 또한 역부족이라는 것이 측근들이 전하는 이 전 대표의 생각이다.

정 위원장은 토론회 이후 주간조선과 만난 자리에서 “이 전 대표께서 깃발을 들어주면 모든 게 해결이 되지 않겠냐고 했다가 ‘정치는 그렇게 해선 안 된다’며 되레 꾸짖음을 받았다”고 말했다.

다만 이 전 대표가 열거한 일련의 요인들은 외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주변 인사들의 시선이다. 이 전 대표의 말을 뒤집어 보면, 이 모든 것이 충족됐을 시 창당은 가능하다는 이야기도 된다. 정 위원장과 이 전 대표 간 대화는 지난 9월에 이뤄졌다. 그로부터 2개월 흐른 지금, 국회 안팎에선 제3지대 논의가 가속화된 데다 비명계의 독자 행보 또한 보다 구체적으로 변모하고 있다. 최근 이 전 대표는 언론 인터뷰와 공개석상에서 당을 향한 비판 목소리를 가감 없이 내고 있는데, 그 수위가 상당히 높아졌다는 점에 주목하는 시선이 많다.

지난 11월 18일 보도된 한겨레 인터뷰에서 이 전 대표는 “국민이 민주당을 질려 한다” “당이 갖고 있던 당내의 다양성과 민주주의라는 면역체계가 무너졌다” “이재명 대표의 사법 문제가 당을 옥죄고 그 여파로 내부의 도덕적 감수성이 퇴화했다” 등의 발언을 내놓았다.

지난 11월 28일 싱크탱크 ‘연대와 공생’이 주최한 학술 포럼 ‘대한민국, 위기를 넘어 새로운 길로’에선 “야당이 참담하다” “거의 질식하고 있다” “붕괴한 것이나 다름없을 만큼 허약해졌고 강성 지지자들은 제도를 압도할 만큼 강력해졌다” 등의 쓴소리를 내놨다. 또 “다당제를 통해 무당층을 국회에 포용하는 것이 정치양극화 극복과 정치불안전 예방에 필요하다”며 “거대정당의 내부혁신이 시급하다”고도 언급했다. ‘신당을 염두에 둔 것이냐’는 기자들 질의엔 “여러 갈래의 모색이 있다”며 “국가를 위해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항상 골똘히 생각한다”고 답했다.

일련의 발언을 두고 이 전 대표가 앞서 측근들에게 언급한 ‘명분’을 쌓기 위해 일종의 전초작업에 나선 것 아니냐는 평이 적지 않다. 11월 28일 학술 포럼에는 설훈 의원과 신경민·최성·김희철 전 의원 등 친이낙연계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친이낙연계 인사들은 이날 발표에서 이 전 대표가 좀 더 진일보한 구체적 발언을 내놓아야 한다고 권했던 것으로도 전해진다.

이낙연 “정치 그렇게 해선 안 된다”

당 밖에선 이미 앞서의 시민모임 ‘민주주의실천행동’을 앞세워 신당 창당의 기반을 만드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크다. 민주주의실천행동은 반이재명·반윤석열 성향의 시민들이 최근 자발적으로 조직한 모임이란 점을 강조하고 있다. 다만 여기에는 ‘모색과 대안’의 박병석 대표, 김효은 전 선대위 대변인 등이 동참하고 있다. 박 대표는 신경민 전 의원 보좌관 출신으로 민주연구원 국장을 역임했다.

민주주의실천행동은 지난 11월 26일 온라인을 통해 2차 토론회를 열었는데 여기서 “‘새로운 정치·정당 플랫폼’을 만들기 위한 행동에 나선다”며 예비당원 모집을 선언했다. 이들은 “상식과 민주주의, 무엇보다 제대로 된 정치의 복원을 위해 창당을 준비하는 예비 정당”이라며 “다른 신당을 준비하는 세력들과 저희가 추구하는 가치가 같다면 과감하고 유연하게 연대하며 나아가겠다”고 밝혔다.

당초 2차 토론회는 12월 말 국회 의원회관에서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한 달가량 앞당겨졌다. 정치권 일각에선 이를 민주당 비명계 모임 ‘원칙과 상식’이 지난 11월 16일 출범한 것과 연관지어 보는 시선도 적지 않다. 토론회에는 신경민 전 의원도 나와 발언할 예정이었으나 일신상의 이유로 나오지 않았다. 민주주의실천행동 측이 지난 11월 27일 첫 논평을 통해 거론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유지’ 필요성은 다음날 이 전 대표가 학술 포럼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맥락을 띠었다.

다만 외적 요인들이 충족된다 해도 이 전 대표가 실제 창당에 나설지는 아직 장담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차재원 부산가톨릭대 특임교수는 “이 대표에게도 내년 총선은 정치 생명을 좌지우지할 만큼 중요하다. 현 체제만을 고집하진 않을 거다. 평당원으로서 백의종군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이 경우 신당에 나선 이 전 대표에게는 배신자 프레임이 씌워질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무엇보다 이 전 대표의 신당은 지역적으로 호남을 제외하면 외연 확장에 어려움을 겪을 여지도 크다. 전남 지역의 한 정치권 관계자는 “지역에서조차 민주당의 지난 대선 패배를 두고 이 전 대표 책임론을 거론하는 여론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또 “타협 없는 그의 정치적 올곧음이 지역 관계자들로 하여금 서운하게 만드는 측면도 있다”고 덧붙였다.

내년 선거제도 변수다. 현행 준연동형 비례제에서 병립형 비례제로 회귀할 경우 신당의 생존력은 더 약해질 수밖에 없다. 또 총선에서 야당이 패배할 경우 그 책임은 오롯이 이 전 대표가 감내해야만 한다. 이 전 대표 입장에선 창당에 앞서 고민하고 따져야 할 점들이 아직 산적해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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