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이 2일 국회 본회의에서 정부 원안보다 4조1000억원이 삭감된 ‘감액 예산안’과 세법(稅法) 개정안들로 구성된 ‘예산부수법안’을 단독으로 상정해 강행 처리하겠다는 방침을 1일 밝혔다. 정부의 예산편성권을 무력화하고 세출·세입을 좌우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대통령실은 “감액 예산안 철회 없이는 증액 협상도 없다”고 했다. 내년도 예산안 처리를 놓고 유례없는 여야의 벼랑 끝 대치가 벌어지고 있다.
앞서 지난 29일 민주당은 헌정 사상 최초로 감액만 반영된 내년도 예산안을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단독 처리했다. 민주당은 2일 본회의에 최재해 감사원장과 이창수 서울중앙지검장 등 검사 3명에 대한 탄핵 소추안도 보고할 예정이다.
민주당 박찬대 원내대표는 이날 기자 간담회에서 “여당과의 합의가 불발되고, 기획재정부가 증액에 동의하지 않아 부득이하게 법정 시한인 2일 본회의에 감액 예산안을 상정하겠다”며 “정부의 대응이 없으면 추가로 불필요한 예산을 더 감액할 수도 있다”고 했다. 이재명 대표도 이날 이철우 경북도지사를 만난 자리에서 “정부가 수정안을 내면 이후 저희와 협의하면 된다”고 했다. 그러나 국민의힘 추경호 원내대표는 이날 “정부·여당이 무릎 꿇을 것이라는 헛된 망상은 버리라”고 했다.
새해 예산안과 예산부수법안은 각각 나라 살림의 세출·세입에 해당한다. 이를 민주당이 자기들 뜻대로 일방 처리하겠다는 것은 사실상 정부의 기능을 무력화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세출·세입은 정부 운영에 핵심적인 요소고, 헌법은 예산 편성권을 정부에 부여하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1일 “예산은 숫자로 구현된 국정 철학”이라며 “거대 야당이 입법 권력을 앞세워 예산안을 일방 처리하는 것은 행정부 권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민주당은 이날 정부 새해 예산안에서 4조1000억원을 감액한 민주당 예산안과 함께 관련 예산부수법안을 2일 본회의에서 처리하겠다고 했다. 여야 이견이 큰 쟁점 법안들을 야당안대로 통과시키겠다는 것이다. 국고 수입에 해당하는 세입에 큰 변동을 주는 세법은 예산안을 본회의에서 표결할 때 같이 올려 처리하게 돼 있다. 예산안의 세입과 국가가 쓰는 세출이 짝을 이뤄야 하기 때문이다. 올해도 우원식 국회의장은 쟁점 세법 35건(정부·여당안 및 야당안)을 예산부수법안으로 지정했다.
민주당은 정부가 추진해 온 상속세 최고 세율 인하(상속·증여세법 개정안)와 배당소득 분리 과세(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를 수용하지 않기로 했다. 배당소득을 분리 과세하면 주주의 세 부담이 감소하는데 “부자 감세”라는 것이다. 상속세 최고세율을 50%에서 40%로 낮추는 정부안도 부결시키겠다고 했다.
국가가 한 해 동안 쓰는 돈에 해당하는 세출과 관련해, 민주당은 이미 지난 29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에서 사상 처음으로 자기들이 조정한 감액 예산안을 강행 처리했다. 증액을 하려면 정부 동의가 필요하니, ‘이재명표’ 지역화폐 예산 2조원 등을 포기하면서까지 정부 편성안의 예비비 2조4000억원과 정부 핵심 사업 예산 등을 깎았다.
민주당은 여야가 증액에 합의한 호남고속철도 건설 예산 등도 원위치시켰다. 정부 원안에 1386억원이 편성된 이 사업은 여야가 국토교통위원회 심사 과정에서 277억원을 증액하기로 했었다. 국토위는 ‘지역구 예산’으로 자주 거론되는 사회간접자본(SOC)을 1조3832억원 증액하기로 했는데, 이 역시 물거품이 될 처지라 의원뿐만 아니라 지방자치단체장들 불만도 큰 상황이다.
정부와 여당은 “감액 예산안 철회 없이는 증액 협상도 없다”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정혜전 대통령실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야당의 일방적 예산 삭감으로 인해 민생, 치안, 외교 등에 문제가 생기고 국민에게 피해와 문제가 발생할 경우 이는 전적으로 야당인 민주당의 책임”이라고 했다. 국민의힘 추경호 원내대표도 “민주당의 행태는 예산 심사권을 정쟁의 도구로 삼아 정부·여당을 겁박하는 예산 폭거이자 의회 폭력”이라고 했다. 추 원내대표 측은 이날 우원식 국회의장이 제안한 여야 원내대표 만찬 회동도 거절했다.
다만 우원식 국회의장이 초유의 예산안 단독 처리에 부담을 느낄수 있고, 지역구 예산 확보가 걸린 야당 의원들의 동요도 있기 때문에 여야가 막판 타협을 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민주당 일각에서는 “일단 감액 예산안을 그대로 통과시키고 내년 초에 추가경정예산안을 편성해, 본예산에 못 들어간 증액 예산을 넣자”는 얘기도 나온다. 민주당 관계자는 “최근 대통령실에서 ‘연초 추경’ 논의가 나온 바 있기 때문에 이렇게 못 할 이유는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