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골드버그 주한 미국 대사가 우리 정부와 국민의힘 고위 인사를 연이어 만나 계엄 사태 이후 한국군의 통수권 문제에 우려를 보인 것으로 10일 알려졌다. 윤석열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군 통수권을 행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북한의 군사 도발 등 유사시 ‘한덕수 총리,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 체제가 대통령 고유 권한인 군 통수권을 행사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지난 9일 골드버그 대사를 면담한 한 대표는 이날 국민의힘 비공개 의원총회에서 “미국에서 ‘우리는 누구와 대화해야 하는가. 윤 대통령인가, 한 총리인가’라는 질문을 직접 받았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외교 소식통은 “미국은 한국의 군 통수권이 사실상 공백 상태라고 본다”며 “한반도에 자국 군인 2만8500명과 그 가족이 머물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안보 문제가 최우선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골드버그 대사는 지난 9일 정부서울청사에서 한덕수 국무총리를 만나 정부가 비상계엄 사태에 대처하는 방향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앞서 8일에는 조태열 외교부 장관을 만났다. 국무총리실은 한 총리가 골드버그 대사에게 “우리 정부가 헌법과 법률에 기초한 국정 운영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고 설명했다고 밝혔다.
골드버그 대사의 발언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그는 우리 정부 인사들에게 ‘한덕수·한동훈’ 체제에서 한반도 안보 문제와 관련해 “북한이 대남 도발을 벌이거나 북한에서 급변 사태가 벌어졌을 경우 미국은 한국의 누구와 상의해야 하느냐”는 취지로 물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한 총리는 골드버그 대사에게 ‘헌법상의 변화 없이 총리와 여당 대표가 공동으로 무언가를 결정해 국가를 운영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취지로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군통수권 등을 총리와 여당 대표가 임의로 가져가 행사할 수는 없다는 의미다.
지난 3일 밤 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직후 폴 러캐머라(주한 미군 사령관) 한미연합사령관이 한국군과 협의 후 대북 정보 감시 태세인 ‘워치콘’을 격상하는 등 한반도 안보는 비상 상태지만, 미국의 우려대로 현재 한국군 통수권은 공백 상태나 다름없다는 지적이다. 국군통수권은 헌법에 명시된 대통령 고유 권한이다. 대통령이 탄핵당해 직무가 정지되면 총리가 권한대행으로 이런 대통령 고유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난 7일 윤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폐기되면서 법적으로 윤 대통령의 직무는 정지되지 않았고, 대통령 고유 권한도 여전히 윤 대통령에게 있다. 그렇다고 정치적으로 무력화된 윤 대통령이 실질적으로 군 통수권을 행사할 수는 없는 상태다. 윤 대통령이 7일 “향후 국정 운영은 우리 당과 정부가 함께 책임지고 해나가겠다”고 밝혔지만, 헌법학자 대다수는 이 선언만으로 대통령 고유 권한이 당정에 위임됐다고 볼 수는 없다고 해석한다. 대통령 고유 권한을 다른 사람에게 위임하는 것 자체가 위헌이라는 의견이 대부분이다.
정부 관계자는 “이런 이유로 유사시 국군과 연합해 군사작전을 하게 돼 있는 미국은 ‘지금 한국군은 누가 지휘하는가’라고 묻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매슈 밀러 미 국무부 대변인은 9일(현지 시각) 브리핑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윤 대통령과 직접 소통하지 않을 것 같다’는 질문에 “바이든 대통령의 관여 계획은 언급할 것이 없다”고 했는데, 이는 사실상 윤 대통령을 동맹 상대국의 실권자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란 해석이 나왔다. 한미일 안보 협력의 한 축인 일본도 이와 관련한 우려를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홍균 외교부 제1차관은 지난 9일 미즈시마 고이치 주한 일본 대사를 면담해 국내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전직 군 장성은 “유사시 군을 총지휘해 국가와 국민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상태로 놔두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대통령의 군 통수권을 합법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대행하게 할 방안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