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이 22일 방미 일정을 마치고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하고 있다. 정 회장은 이번 방미 일정 중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과 만나 대화를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뉴스1

12·3 계엄 사태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 여파로 한때 삐걱댄 한미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한 외교 당국의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조태열 외교부 장관, 김선호 국방부 장관 대행(차관) 등이 각각 미국 측 카운터파트와 잇따라 전화 통화를 하고 “한미 동맹에 이상 없다”는 메시지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이는 임기가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바이든 행정부와의 소통이다. 바이든과 180도 다른 대외 정책을 예고하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이 다음 달 20일 취임하지만, 우리 정부는 트럼프 행정부 측과의 소통에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 직무 정지 전에는 물밑 대화가 오갔으나, 최고 결정권자의 부재로 이와 같은 교류가 막힌 것이다. 이미 트럼프와 ‘정상 교류’를 성사시켰거나, 정상회담 일정을 잡고 있는 주요국들과도 대비된다. 정부 안팎에서는 트럼프 행정부 출범과 함께 닥쳐올 경제·안보 위협에 한국만 무방비 상태라는 우려가 나온다.

그래픽=이철원

조태열 외교부 장관은 21일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과의 통화에서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 아래에서도 한미 동맹이 흔들림 없이 계속 유지·발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자”며 “그동안의 한미, 한·미·일 협력 성과가 미국 신행정부 아래서도 계속 발전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자”고 했다. 블링컨 장관은 이에 동의하면서,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에 전적인 신뢰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블링컨 장관은 미국의 철통같은 대한 방위 공약이 변함없음도 재확인했다. 양측은 조속한 대면에 합의했고, 늦어도 다음 달 중순 이전에 만나기로 했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와의 접촉에선 별다른 성과가 없는 상황이다. 12·3 계엄 선포 이전에는 대통령실 등을 통해 트럼프 당선인 측과 활발한 움직임이 있었지만, 지금은 이런 교류가 다 중지된 상태라고 한다.

한국이 트럼프 측과의 대화를 이어가지 못한 사이 세계 각국 정부는 미국 신행정부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총력전을 벌이고 있다. 일본은 숨진 아베 신조 전 총리 부인인 아베 아키에 여사까지 나서서 트럼프에 대한 외교전에 나섰다. 트럼프 당선인은 손정의 소프트뱅크 그룹 회장과도 만났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 7일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재개관식에 트럼프 당선인을 초청해 만났고, 내년 2월 조기 총선을 앞둔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도 두 차례 전화 통화를 했다.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지난달 플로리다로 날아가 트럼프 당선인을 만나 관세 문제를 논의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지난 1일 배우자인 사라 네타냐후를 플로리다로 보냈다. 대만은 트럼프 당선인 취임식에 한궈위 국회의장이 인솔하는 대규모 대표단을 파견하기로 했다. 정부 관계자는 “관세나 전기차 보조금 등 경제 문제도 큰 과제지만, 우린 다른 국가와 달리 방위비 분담금 협상이나 대북 관계까지 얽혀 있다”며 “어느 나라보다 트럼프 행정부와의 관계 구축이 시급한 상황에서 되레 우리만 소외되고 있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다”라고 했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이 22일 방미 일정을 마치고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을 통해 귀국하며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정 회장은 방미 일정 중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과 만나 대화를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뉴스1

우리 측 인사 중 트럼프 측과의 접촉이 알려진 건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뿐이다. 정 회장은 지난 16일부터 트럼프 당선인 자택인 미 플로리다주 팜비치의 마러라고 리조트에 머물며 트럼프 당선인과 만나 식사를 함께했고, 10~15분 정도 대화를 나누며 여러 주제에 관해 심도 있는 대화를 했다고 한다. 정 회장은 다만 “(트럼프 당선인이 한국과 관련한) 특별한 언급은 없었다”고 했다. 기업인으로서 트럼프 당선인과 만났지만, 전반적 외교·경제적 현안을 논의할 만한 자리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이와 관련해 정부 고위 관계자는 “정부 간의 대화는 비밀 사안이라 기업인과 공유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했다. 정 회장은 22일 인천공항으로 귀국하면서 기자들과 만나서는 “(트럼프 주변인들이) 최근 한국 상황에 대해 관심을 표했다. 대한민국은 저력 있는 나라니 믿고 기다려달라. 빨리 정상으로 될 것’이라 말했다”고 했다.

대미 외교 공백 문제는 야당도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도 최근에는 공개적으로 ‘한미 동맹 발전’을 얘기하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대미 외교 정상화는 여야가 따로 없는 과제”라며 “여·야·정 협의체가 가동되면 최우선적으로 대(對)트럼프 행정부 외교 대책을 논의해야 한다”고 했다.